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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ihyun Dec 08. 2018

나를 믿고 나만의 방식으로

또한 나의 속도로

얼마 전 카카오에서 주최한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 오프라인 독립출판에 대한 모든 것' 강의에 다녀왔다.


브런치를 통해 책을 출판한 작가님이 강의를 해 주셨는데, 브런치 작가가 될 수 있는 팁을 전수해 주셨다.


계획을 세우는 것이 익숙한 듯한 그분은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할 때 앞으로 쓸 글의 목록을 적었다고 했고, 평소에도 글을 쓰기 전 목차와 구성이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다고 하셨다.


달라도 너무 달라서 웃음이 나왔다.


나는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할 때, '어머, 작가가 되어야 브런치에 글을 발행할 수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그래서 브런치 글들이 좋았던 거였군요. 예전에 카카오에서 브런치 작가되기 클래스를 연 적이 있었는데 제가 원하는 때에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브런치에 들어오고 싶어 신청을 안 했었어요. 저는 이 지역과 자연, 심리, 제가 믿는 종교인 가톨릭에 대한 글들을 주로 쓸 거예요.' 대충 이런 이야기를 즉흥적으로 썼다. 위의 표현보다는 좀 더 문어체에 가깝게, 그 대신 심사 대상이 될 글들은 신중히 선택해서.


휴대폰에 브런치 앱을 깔고 글을 하나 쓴 뒤, 작가가 안 되면 글을 발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홧김'에 작성한 신청서라 당시 제출한 원본이 남아 있지 않다. 기억이란 왜곡되기 쉬우니 그때 글을 다시 보면 많이 다를 수 있겠지만, 어쨌든 적고 싶은 내용을 별 격식 없이 적었다.


나와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브런치 작가에 지원한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니 옛 기억이 떠올랐다.




때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리고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하던 6월.

나는 고시생 신분으로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느라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시험은 8월이었고 5~6월엔 실전 연습을 위해 학원에서 G/S(Group Study) 수업을 들었다. 그동안 공부한 것을 점검하는 차원에서 수험생들이 모여 주관식 모의고사를 보면 학원에서 점수를 매겨 주는 방식이었다.


어느 과목 G/S 수업을 들었는데 논점이 많고 까다로운 문제가 50점짜리로 나왔다. 힘들게 시험을 보고 좌절스러운 점수를 받았다. 비단 그 과목에서만 느꼈던 감정은 아니기에 좌절감과 막막함, 불안감을 매번 경험하며 시험에 필요한 모든 과목 G/S를 마쳤다.


실전 감각도 익혔고 이제 시험은 두 달도 안 남았으니 지금까지 배우고 외운 것을 반복할 차례였다. 그러나 반복 학습과 암기에 매진하려니 어려웠던 G/S 문제를 미처 복습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G/S 수업을 듣는 동안 매주 진도에 맞춰 공부하느라 시험 후 모범답안을 찬찬히 살펴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복습하지 못한 찜찜한 마음을 안고 이미 알고 있는 내용만 반복 학습할 것이냐, 찜찜함을 덜기 위해 시간을 내어 G/S 문제를 다시 볼 것이냐.


나는 후자를 택했다. 사안이 복잡한 그 문제들을 다 이해하지 않고 넘어가면 똥 싸고 밑 안 닦은 느낌이 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좀 더 점잖고 고상한 표현을 쓰고 싶지만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을 내어 G/S 문제들을 모두 검토했다. 몇 달 동안 쌓인 문제를 보다 보니 시간이 꽤 걸렸다. 시험까지 남은 날들은 하루하루 줄고 있는데, 막판 스퍼트를 올리기는커녕 머릿속 새로운 기억 생성에 시간을 보내다 보니 불안한 마음이 자주 올라왔다.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의 빠른 진도, 학원 게시판에 자주 올라오는 '이맘때쯤이면 어떻게 해야 한다' 류의 글들도 불안감을 높이는 데 일조했지만, 그럼에도 나를 믿어 보기로 했다.

그렇게 몇 주에 걸쳐 G/S 복습을 끝냈다. 누군가 이야기했듯이 그 공부는 암기할 양이 많아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듯한 공부였다. 그래도 빠르게 자주 물을 부어, 시험 보는 그 순간엔 밑 빠진 독이 잠시 차 있게 하자는 마음으로 8월 시험에 임했다. (역시 앞에서 이야기한 누군가-선배 합격자-가 한 말이다.)


시험 전 배탈이 나서 택시를 타고 시험장으로 가는 길에 차를 세워 놓고 몇 번 토하고, 한 개에서 갑자기 세 개로 바뀐 답안지에 적응하지 못해 답안을 바꿔 쓰고, 수험 번호가 뒤였던 탓에 문제 정정 사실을 시험 시작 한참 뒤에야 전달받고, 펜으로 휘갈겨 작성한 답안지에 먼저 적은 연필 자국은 미처 지우지도 못하고...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과는 합격이었다.


6월 G/S에서 본 복잡한 50점짜리 문제와 완전히 똑같은 문제가 25점짜리로 나왔기 때문이다.


100점 만점에 50~60점이 합격선인 시험에서 1~2점 차이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완전히 알고 있는 문제가 시험에 나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것이다.


그때 그 G/S 문제를 복습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어렵고 복잡한 문제는 시험에 안 나올 것이라 예상하고, '수험생 트렌드'에 따라 이미 알고 있는 내용만 반복하는 공부를 했다면 나는 아마 합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복잡한 문제를 이미 잘 알고 해결할 수 있었던 사람은 관계없겠지만, 모범 답안을 보고도 쟁점을 이해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 문제를 나만의 것으로 다지는 불안함 위의 시간이 합격을 위한 필수 요소였다.


양이 많은 공부일수록 철저한 계획을 세워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예상보다 먼저 본 1차 시험 때를 제외하고는(그때는 수천 페이지를 몇 달 안에 이해하려니 하루에 봐야 할 페이지를 계산할 수밖에 없었다) 계획표를 짜서 공부해 본 적이 없다. 그날 마음 상태에 따라 공부가 필요할 것 같은 과목을 들여다봤고, 덕분(?)에 전과목 책을 다 들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자전거 앞에 달린 철제 바구니가 책 무게를 이기지 못해 끊어질 정도로.


어쨌든 계획 대신 '감'에 의존하는 공부를 한 덕에 G/S 문제도 복습할 수 있었고, 그 덕에 합격할 수 있었다.


내가 한 선택이 맞는지 의심스럽고 불안할 때, 다른 사람들은 지름길로 빨리 가는데 나만 뒤처지는 느낌이 들 때, 2002년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조금 안심이 된다. 나를 믿고 내 선택을 믿어 보자. 남들이 어떻게 하고 있고, 어떻게 하라고 말하고 있든 간에.




브런치를 통해 실제 작가가 되신 그분 강의에 태클을 걸려는 건 아니다. 브런치가 뭔지 제대로 알기도 전에 제주 이민에 대한 그분 브런치를 우연히 읽은 적이 있다. 주소까지 즐겨찾기 해 놓고 열심히 읽었다.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좋은 인상을 갖게 해 준 고마운 분이기도 하다.


다만 그날 그 강의를 듣고서, 브런치 작가가 되려면  반드시 앞으로 쓸 글의 목차를 적어야 하고 글은 반드시 계획적으로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걸 알리려고 이 글을 쓴다. 그 방식대로 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평소처럼 이번 글도 구상을 끝낸 뒤 쓴 것이 아니다. 그냥 마음속에서, 머릿속에서 나오는 대로 썼다. (물론 퇴고의 과정은 여러 번 거쳤다.)


남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나도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를 믿고 나만의 방식으로
또한 나의 속로 살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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