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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ihyun Dec 06. 2018

바쁠수록 천천히

오늘 하루의 기록

오늘 관청에 제출하게 될지도 모를 서류가 4개였다. 아침부터 어깨가 무거웠다. 오후까지 보낼 견적서도 하나 있었다. 오전에 견적서를 작성해야 할 것 같아서 요가는 가지 않았다. 요가를 다녀오면 오전 시간이 다 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할 일이 많아서 스트레스가 느껴지고 몸이 긴장되었지만 마음을 한번 바꾸어 보았다. 만약 오늘 휴가를 낸다면 어떻게 될까? 일 때문에 결근하면 안 될 것 같은 날 부득이한 사정으로 빠지더라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고 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회사 다닐 때의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견적서 보내기 하나였다. 나머지 일들은 고객들이 빨리 해 달라고 요청해서 나 혼자 마감을 오늘로 정한 것일 뿐 사실 내일 해도 문제없었다.


원래는 아침을 먹자마자 10시에 일을 하러 가려고 했다. 그러다 '오늘은 쉬는 날'이라는 마음으로, 어제 도착한 미니오븐을 가동시켜 보았다. 별문제 없이 잘 작동했다. 그다음엔 오븐이 담겨 있던 상자를 베란다로 옮겨 놓았다. 쌓여 있는 상자가 몇 개 되다 보니 상자 재배치가 생각보다 복잡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오늘 휴가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운전해서 일하러 가는 길에 업체에서 견적서를 보내달라고 전화할지 모르니 집에서 통화를 하고 가자.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막상 얘기를 나누다 보니 나에게만 견적서를 받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쩐지 어제 전해 들은 사정으로는 아침 일찍부터 전화가 올 것 같았는데 10시가 넘도록 아무 연락이 없더라니.... 나도 'one of them'에 지나지 않으므로 별 부담 없이 서두르지 않고 견적서를 만들어 보냈다. 결국 이 일도 오늘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상자를 정리하고 견적서를 쓰다 보니 12시가 가까워졌다. 이 시간에 일을 하러 나가면 밥을 사 먹어야 하니 점심을 먹고 갈까? 오븐이 도착했으니 냉동실에 대기시켜 두었던 칠리새우를 요리해 먹을까?(이마트 노브랜드 칠리새우가 맛있다기에 이마트몰에서 삼다수를 주문하며 함께 주문한 적이 있는데, 프라이팬에 부은 기름은 사방으로 튀고, 튀김 먹은 속은 더부룩하고... 그 이후 에어프라이어나 미니 오븐을 사려고 마음먹었다) 오븐의 첫 요리는 칠리새우로 개시했다. 몇 분 정도 돌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네. 15분쯤 했나?


칠리새우에 딸린 소스가 매워서 소스 약간에 물을 붓고 끓인 뒤, 오븐이 기름 폭발 없이 우아하게 구워 낸 새우를 넣고 볶았다. 밥도 없이 칠리새우 요리만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본래의 소스가 어찌나 맵던지 입가에 묻은 희석된 소스도 따갑게 느껴졌다.


설거지를 끝내고 새로 산 미니오븐에 만족해하며 차를 가지고 일을 하러 갔다. 한 건의 서류 준비를 마치고 나머지 건 서류도 작성했다. 생각보다 별 고민 없이 빨리 끝냈다.


초안을 고객들께 보내고 바람도 쐴 겸 밖으로 나왔다. 어느 빌라 바깥에 붙어 있는 부동산 전화번호. 지금 사는 집 만기가 얼마 안 남았는데 계속 연장할지 새로운 곳으로 옮겨갈지 결정하지 못했기에 다른 집들을 구경했다.


부동산 아저씨와 함께 몇 군데 집을 둘러보았다. 따뜻하고, 수납공간 많고, 시설 좋은 지금 이 집을 따라갈 만한 곳이 별로 없었다. 잠시 동안의 기분전환을 끝내고 다시 돌아와 일을 했다. 서류 하나를 제출했다. 또 다른 사건의 기본 서류도 작성했다.


6시가 조금 넘어 차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담가 놓은 쌀을 밥솥에 안치고 취사 버튼을 누른 뒤 7시 운동을 하러 갔다. 하늘 위에서 요가를 한 뒤(플라잉 요가) 집에 와서 저녁을 먹었다. 오븐이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던 생선을 냉동실에서 꺼내 또 구웠다. 나는 생선구이를 별로 안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녔는데(프라이팬만 썼던 지난 1년 반 동안 한 번도 내 손으로 생선을 구워 먹은 적이 없다), 사실은 굽는 과정의 번거로움-기름, 냄새, 시간 등-을 안 좋아했었다는 걸 오늘 알게 되었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며 SNS에서 한동안 핫했던 '마약 계란'을 만들었다. 두고두고 먹기에 좋으니까.

설거지 후에는 샤워를 했는데, 몇 주 동안 방치한 욕실의 때가 눈에 들어왔다. 샤워를 끝낸 뒤 청소도구를 가져와 욕실도 깨끗하게 닦았다.


이 모든 걸 끝내고 나니 10시. 몇 달만에 팩을 꺼내 얼굴에 붙이고, 브런치에 글을 쓴다.


오늘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아침에 잠시 느낀 중압감과는 달리 하루 동안 많은 일을 여유롭게 했다는 걸 깨닫고 알리기 위함이다. 이 모든 것은 '오늘 꼭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오늘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피치 못하게 하루 휴가를 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평소처럼 중압감에 못 이겨 서둘러 10시에 일을 하러 가고, 바람도 쐬지 않고 일만 했다면 이런 일들을 다 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아마도 허둥지둥 시간에 맞춰 이곳저곳 정신없이 다녔을 것이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가 진리처럼 여겨지는 시대이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니 삶이 여유로워진다.

자주 이런 여유를 느끼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스트레스와 중압감이 느껴지는 날이 있을지라도, 오늘처럼 느긋하게 많은 일을 하며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으니까. (슬프게도 이 선택이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2018.12.5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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