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ihyun Apr 27. 2020

은둔 소감

의도하지 않았던 은둔(?) 생활이 길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생활이 이토록 내 적성에 맞을 줄이야.


고등학생 때 '죽림칠현' 같은 걸 배울 때였나. 현실에서 벗어나 사람 많지 않은 곳에 숨어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 욕구는 컸지만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전지구적 바이러스 사태로 반강제적 은둔 상태가 되니 마음이 조금 투명해지는 느낌이다.


사람과 덜 만나니 갈등도 적고, 나의 주된 관심은 밥 해 먹는 것에 쏠리게 된다. 아침에 일어나 환기를 하고, 바닥을 청소하고, 아침 먹을 준비를 하고... 컴퓨터를 켜 볼 일을 보고, 조금 지나고 나면 또 점심 먹을 시간이고. 점심을 먹고, 먹은 걸 치우고, 따뜻한 봄볕에 산책하러 나가고. 볕을 쬐다 돌아와 조금 쉬고 나면 또 저녁 먹을 시간이고. 세 끼 밥만 해 먹고 살아도 하루는 금방 간다.


이렇게 단조롭게 살아도 내 안에선 많은 감정이 오간다. 예전에 바쁘게 살 땐 그 감정에 휘둘리기도 하고, 감정이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지금은 바깥 창문을 내려다보듯 감정이 흘러가는 걸 바라보게 된다. 이런 감정이 올라오는구나, 이런 감정이 드는구나, 하고. 때론 이 감정이 내 것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은둔형 생활을 하고 있지만 고립되어 있지는 않다. 오래된 친구들과는 그 어느 때보다 자주 연락했고, 이 시기의 답답함과 불안함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먹을거리로 뭘 주문하면 좋은지, 어떤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 좋은지 정보를 나누었다. 집 안의 고추장, 된장, 간장 등 양념이 너무 빨리 떨어지고 있고, 쌀도 자주 사야 한다는 공통의 곤란함(?)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기술이 발달한 덕분에 각자 떨어져 지내도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었다.


오늘은,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우울'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혼자 가만히 지내는데도 이렇게 많은 감정이 이토록 자주 느껴지다니. 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내 감정의 원인을 다른 데 돌리는 습관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에 '죽림칠현' 같은 환경을 동경했던 건 아닐까.


바이러스 사태를 겪는 동안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기도 하고 트위터에도 짤막한 글을 남겼지만 정말 내밀한 이야기, 일기 같은 이야기가 쓰고 싶어 들어온 곳은 브런치이다. 원래 그러려고 만든 곳인데, 알고 보니 여기 글은 다른 어떤 매체보다도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기 쉽다는 함정이 있었지만.


그래도 내 마음을 적을 곳이 있어 좋다. 페이스북은 페이스북대로, 트위터는 트위터대로, 인스타는 인스타대로 다 장점이 있으니까. 각자의 장점을 살려 잘 쓰면 되니까.


나의 자발적 은둔 생활이 길어져도 좋겠다는 생각. 5월 초 황금연휴를 앞두고 18만 명이 제주도를 찾는다는데-서귀포시 전체 인구가 18만 명인데!-이 느슨해진 분위기 속에서도 자연은 감상하되 번잡하지 않은 환경 속에 지내보리라.

 

덤으로, 봄볕이 화창하던 날 우리 동네 클라스를 자랑(?)하고 싶어 올리는 사진.


작가의 이전글 안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