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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르스IRS Nov 23. 2022

나도 모르는 새에 인생멘토가 되어 있었다

뿌듯함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끼는 순간

작년 4월 중순쯤부터 당시 중학교 2학년 아이(가명으로 '주동이'라 부르겠다)와 수학 과외를 시작했다. 엄마 교회 지인분의 아들래미였는데 주동이 어머님은 성적을 높여주기로 유명한 학원에 주동이를 보내고 싶어하셨다. 학원에 들어가려면 시험을 봐야 하는데 지금 성적으로는 어려울 것 같으니 단기로 과외를 해줘서 들어갈 수 있게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시간이 꽤나 지나서 첫 만남은 어땠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가 초반에 느꼈던 느낌은 '기초가 많이 부실하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내가 본 주동이는 곱하기와 제곱을 헷갈리거나 분수 계산을 잘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도 중요한 건 지금의 성적이나 실력이 아니라고 믿었기에 학교 진도에 맞춰서 개념을 설명해주고 문제를 푸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다. 혹시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차근차근 설명해주었고 문제를 풀 때 노트를 꼭 가지고 와서 깔끔하게 과정을 적어보도록 했다.


감사한 건 주동이의 점수가 정말 잘 올랐다. 그런데 좋은 쪽으로 이상하게 올랐다. 작년 1학기 중간고사 점수가 40-50점대였는데 1학기 기말고사 점수는 70점대였고 그 이후로 90점 밑으로 받은 적이 없었다. 처음에 기초가 부족했던 것만 생각하면서 수업 내내 기초를 잡아주려고 노력하고 부족해 보이는 건 따로 개념을 기억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개념을 정리해놓은 사전 같은 책도 사비로 사주기도 했었다.


그렇게 하면서도 문제를 풀면서 헷갈리는 부분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물론 내 실력이 부족한 것도 있었겠지만 내가 개념을 잘 못 잡아줘서 어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문득 숙제를 풀어오면 틀린 문제가 없었던 것이 생각나서 물어봤다.


"주동아, 너 혹시 옆에서 누가 보고 있으면 많이 불편하니?"


주동이는 조심스럽게 그렇다고 했다. 옆에서 누군가 보고 있으면 빨리 풀어야 할 것 같고 틀리면 안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물어본 데에는 몇몇 근거가 있었다. 하나, 일단 주동이는 겁이 많고 마음이 여려서 절대 정답지를 베껴서 오지 않는다. 못하면 못했다고 했지 거짓말을 해서라도 풀어올 아이가 아니었다. 심지어 정답지는 어머님께서 가지고 계셨다. 둘, 직접 풀었다면 기초가 부족한 게 전혀 아니었다. 개념서에 있는 문제들이라 개수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초가 없어서 모른다면 손도 못 댈 것 같은 문제들이었다. 셋, 개념서 문제도 문제지만 시험 점수가 원래 저렇게 다이나믹하게 오르는 건 기초가 부족했던 게 아니다. 나중에 느낀 것이지만 오히려 수학 부분에 작지 않은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이외에도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근거가 있지만 사소하기에 넘어가도록 한다. 본질적인 문제를 파악하고 나니까 수업은 오히려 편해졌다. 문제 풀 때 헤매거나 헷갈리더라도 모르는 게 아님을 아니까 그냥 넘어가거나 조금 도와주어서 빠르게 지나갈 수 있게 했다.


대신 수업 중에 하는 잡담들도 들어주었다. 학교에서 어떤 일이 있었거나 평소에 하던 생각들을 얘기해줄 때 친구들 이름도 잘 모르지만 최대한 들어주려고 했고 전에 들었던 이름이면 아는 척도 해봤다. 그리고 끈질기게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을 찾아보라고 했고 응원을 해주었다. 예를 들어 당시 한참 유행하던 팽이 만화에 나오는 팽이를 자기가 특별한 조합으로 만들어볼 수 있을 것 같다길래 그걸 만들어서 당*마켓에다가 팔아보라고도 했다. 중학생이라고 하지만 나이를 떠나서 존중해주려고 노력하니까 주동이도 마음을 많이 열어주었다. 공부를 안 한다고 무조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리고 1년 반쯤 과외를 했던 주동이가 얼마 전 들어가고 싶어하는 전기 고등학교(자신이 진학하고자 하는 학교에 지원해서 들어가게 되는 고등학교. 특성화고, 마이스터고 등이 있다)에 지원하려고 하는데 자기소개서를 써야 한다는 사실에 당황해하면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문항들이 어렵지 않았을 뿐더러 그렇게 얘기를 많이 했던 나도 몰랐던 알찬 경험들이 있다는 걸 알고 나니까 오히려 경쟁력 있는 자소서가 나왔다.


며칠 뒤에 서류 전형에 합격해서 면접을 봐야 하는데 면접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길래 다시 만났다. 질문이 꽤나 양질의 질문이었는데 합격률을 높이려면 주동이의 진실된 이야기를 잘 다듬어서 넣는 게 최고라고 생각이 되어 많은 부분을 물어보면서 같이 질문에 대한 대답 예시를 적어봤다.


그러고 나서 일주일 정도 지나자 갑자기 사진을 보냈길래 혹시나 해서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합격했다는 결과가 뜬 화면을 캡처해서 나에게 보내준 것이었다. 기도하면서 좋은 결과가 나왔으려나 하며 마음 졸였던 나에게도 너무나 감사한 소식이었다.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말을 하면서 대화를 마무리했다.


고등학교 수학을 가르쳐줄 수는 있기는 하지만 준비가 거의 필요없었던 중학교 수학과는 달리 나도 많은 준비를 해야 했다. 또 합격한 학교가 마이스터고등학교다 보니 나와 과외를 해가면서 공부를 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애초에 수학에 재능이 있는 아이니 더 지혜로운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과외를 마무리해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어 어머님을 만나 마무리하게 될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다. 주동이와 과외를 하면서 느낀 주동이의 재능이나 잠재력에 대해서 얘기를 하다가 문득 어머님께도 너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외를 진행하는 동안 어머님은 자주 전화를 해서 주동이가 잘하고 있는지, 문제는 없는지 확인하지도 않으셨고 내 방식을 어느 정도 알고 계셨음에도 나를 믿고 맡겨주셨었다. 얘기를 나누다가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냐고 여쭤보니까 주동이가 나와 과외를 하고 오면 표정이 항상 좋았기 때문이었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때 참 큰 감사와 뿌듯함을 느꼈다. 내가 믿고 있던 것이, 그리고 그것을 전해주려고 했던 노력이 틀리지 않았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어머님은 주동이가 한참 사춘기가 시작될 때라 얘기 들어줄 사람이 계속 곁에 있었으면 하셨다고 말씀하셨지만 떠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던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알아서 잘할 거라고, 괜찮다고 말씀 드리면서. 그후에 교회에서 할 일이 생겨서 교회 어른들이랑 같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주동이 아버님도 그 자리에 계셨다. 유쾌한 성격을 가지고 계셔서 일을 하면서 농담도 했는데 지나가는 말씀으로 주동이가 나를 인생 멘토라고 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진짜 슥 지나가는 말씀이었지만 나에게는 아직까지도 큰 울림으로 남아있다. 보잘것없는 내가 누군가의 멘토가 됐다는 게 참 마음이 따뜻해지면서도 어깨가 무거워졌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든든하게 버티고 서있어야만 주동이를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동이가 나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다른 분도 나에게 과외를 부탁하시기도 했다. 아마 진행하게 될 것 같은데 이번에는 좀 더 자신감을 갖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잘한다는 말에 심취해 흐트러지지 않도록 더 집중해야 할 것 같다.


어떤 단체나 개인을 이끄는 사람들의 역할을 나는 세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스'와 '리더', 그리고 '멘토'. '보스'는 사실 '리더'와 많이 비교하면서 위 사진처럼 남들 위에 군림하면서 명령하는 형태로, '리더'는 함께 이끌면서 사람들을 이끄는 형태로 묘사된다. 그러나 최근에 내가 몇몇 매체에서 본 '멘토'라는 역할은 나에게 너무나도 매력있게 다가왔다.


'멘토'란 자신이 이끄는 '멘티'의 성장을 목표로 하되 독립할 수 있게 등을 밀어주는 역할이다. 멘티가 또다른 멘토가 될 수 있게, 혹은 날개를 펴고 홀로 날아오를 수 있게 지원하는 역할이 나의 재능과도, 선호와도 너무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나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삶이 더 행복하고 밝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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