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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Feb 27. 2020

오아시스에서 잠시 휴식하기

타인의 시선을 통해 보이는 어떤 세상

이번엔 사막이다. 여름에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자연재해는 다 겪은 기분이다. 마음의 열기는 좀체 가라앉을 생각이 없는 듯하고 오아시스 또한 아득히 느껴진다. 마음의 소용돌이는 모래바람을 일게 한다. 나는 그 속에 섞여 혼란을 겪는다. 이 여름은 내게 어떤 색으로 남게 될까.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자 불안한 눈빛으로 흔들리는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몇 개의 물음 끝에 마침표가 찍힌다. 어쩌면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간극을 채운다. 아주 작은 틈과 공간 사이로 바람이 분다. 우리에게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

​복잡한 경복궁에서 벗어나 거리로 나간다. 독립문이 적힌 표지판을 따라 시장 골목에 닿는다. 몇 해 전 친구들과 함께 찾았던 피자 가게가 보인다. 여러 건물을 지나 갈색빛 벽돌집 앞에 멈춘다. 마당에는 우리 키의 두 배쯤 되는 식물이 있고 옥상 위에는 새하얀 구름이 넓게 퍼지고 있다. 그는 말한다. 알로카시아가 아주 멋지다고. 나는 대답한다. 아카우카리아인 것 같다고. 하지만 곧 키가 큰 식물의 정체가 바나나 나무라는 걸 깨닫는다. 서촌에 있는 어느 국밥 가게. 나는 국밥을 사랑한다. 당신과 함께 먹을 때 느껴지는 행복은 말할 것도 없고. 고개를 돌리자 벽면에 붙은 편지가 보인다. 엄마가 아들에게 보내는 긴긴 사랑을 읽는다. 맑고 뜨거운 국물에 마음에 어떤 감정을 몰래 섞는다. 깍두기를 떨어뜨리고 그와 눈이 마주친다. 당신이 건네는 휴지를 받고 괜찮다고 말하자, 생각지도 못한 문장이 귓가를 가득 채운다. “그럼 놀란 니 마음을 닦아.”

​고작 네 시간을 자고 일어난 게 문제였을까, 아니면 과도한 스트레스가 문제였을까. 어지러웠다. 서울에 온 이유는 분명했지만, 몸을 위하는 게 더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냥 사진전 안 갈래.” 하지만 뜨거운 국물은 금세 몸과 마음을 진정시킨다. 내가 회복했다는 걸 알아챈 그가 사진전을 보러 가자고 말한다. 괜찮다고 웃어 보이자 빈이 입을 연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묻는다. 가고 싶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한가람 미술관, 매미소리를 지나자 벽면 가득 능소화다. 골목에는 나무 아래 그늘길이 있고, 우리의 걸음 끝에는 나를 미소 짓게 하는 현수막이 있다. 3년 전에 시작된 나의 취미, 사진전을 찾아다니는 것. 수박 주스로 더위를 달래고 여행자들의 방으로 향한다.

천체들 간의 거리는 어마어마해서 별과 은하계에서 발한 빛이 지구에 도달하려면 오랜 시일이 걸린다. 따라서 우리가 망원경을 통해 보는 빛은 아주 오래전에 천체의 빛이 처음 여정을 시작했을 때의 모습이다. 사실상 우리는 머나먼 과거를 보고 있는 셈이다.
-사진작가 조 맥널리

물고기 떼가 바다사자를 감싼 채 물속을 유영하는 모습, 사막의 밤을 빛내는 은하수, 코끼리 상아에 앉아 동물과 교감하는 할아버지, 토란잎 아래 비를 피하는 새끼 오랑우탄, 빙하 아래 피난처를 찾는 작은 표범, 수련과 연꽃 아래 펼쳐진 광경들. 우리는 낯선 세상을 들여다보며 아름다움을 만난다. 한 작품 앞에서 한참을 머물기도 하고. 그렇게 많은 사진 앞에서 마음이 동한다. 이렇듯 누군가의 시선은 여행이 된다.


오후 세 시, 이제는 어두운 커튼을 걷어내고 다시 세상 속으로 걸어 나가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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