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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Feb 28. 2020

일곱 번의 계절을 보내고 사랑을 쓰다

여름의 끝무렵, 우리가 만난 가을에 대하여

긴긴 장거리 연애의 막을 내리며 우리의 새로운 시작을 축복하는 어느 가을날, 당신을 만나 활짝 웃는다. 계절은 변하고 있지만 여전히 여름 같은 우리는 서로의 체온에 기댄 채 거리를 걷는다. 그의 전역이 믿기지 않아 감탄사를 내지르거나 알고 있는 사실을 몇 번이나 되묻는다. 오후 네 시쯤,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동네에 도착한다. 우리는 늘 그래 온 것처럼 소소한 데이트를 즐긴다. 예를 들면 게임장에 들러 농구 시합을 하고 가까운 가게에서 저녁을 먹는 일. 배가 터질 것 같아도 아이스크림을 사러 마트에 가는 일 같은. 해질 무렵, 하늘은 아름답게 물든다. 이 순간을 향유하며 느릿느릿 집으로 향한다.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한다. 문이 열리는 순간 깜짝 선물을 발견한다. 상자 속 해바라기와 예쁜 신발, 편지와 벽에 붙은 글자들. 벅찬 행복을 안고 웃음을 터뜨린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 분주하게 움직였을 그의 모습이 귀엽게만 느껴져서.

​월요일 오후. 하늘색 남방을 입은 그를 만난다. 익숙한 건물에 들어가 메뉴를 주문하면서 당신의 전역을 실감한다. 점심은 새싹과 야채가 넉넉한 비빔밥.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커피와 초콜릿을 들고 나무 의자에 앉는다. 한가한 오후에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일이라. 간절히 바랐던 일은 곧 평범한 순간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시작된 만남에 뜨거워질 테고, 반짝이는 소중한 것들을 지키려고 노력하겠지.


그를 보내고 인화한 사진을 찾는다. 그다음엔 꽃집에 들러 작은 선물을 고른다. 와인빛이 도는 소국을 보자 웃음이 번진다. 말린 프리지아와 소국을 담아둔 유리병이 생각나서. 집에 돌아와 종이책에 사랑을 불어넣는다. 사진 열네 장을 자른 뒤 빈 공간에 색을 입힌다. 마지막 페이지가 넘겨지는 순간, 고요했던 마음이 마구 흔들린다. 수많은 날들과 미처 헤아리지 못한 우리의 파도가, 쏟아지는 지난 시간이 스쳐서. 아무 때나 전화를 걸 수 있다는 것, 늦은 밤 함께 야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것. 이 사실은 언제쯤 내게 와 닿을까?


빈의 사물함에 선물을 넣는다. 그는 나를 찾아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재잘재잘 떠들더니, 사물함을 열었다고 고백한다. 선물을 들고 온 남자가 말한다. “이것도 말려서 유리병에 넣어줘. 열 개 채워지면 결혼할래?” 당신과 나의 간극이, 물리적 거리가 시간으로 설명되는 날. 우리가 긴 여정에 오른 지 일곱 번의 계절이 흘렀으며 넘겨진 달력은 스무 장도 넘는다. 몇 해 전 겨울에 멈춰 있던 시계가 다시 움직인다. 우리는 다시 강가로 나가 밤 산책을 하거나 발이 아픈 줄도 모르고 옆 동네로 향할 테다. 한동안 군복 입은 그의 모습이 아른거릴지도 모른다. 미조에서 걸려오던 전화와 수화기 너머의 소음이 그리워질 수도 있고. 하지만 그리움이 애틋함으로 변하는 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이 있었는지, 감히 상상할 수 없으리라. 눈물 섞인 작별과 크고 작은 냉전, 그걸 다 잊을 수 있을 만큼 행복하고 다정한 날들. 사랑의 기반을 단단하게 만든 건 그런 순간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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