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캐롤 Feb 25. 2020

장거리 연애의 끝무렵

당신과 보내는 마지막 휴가 일기

마지막 휴가와 긴 여름이 막을 내릴 때쯤, 새로운 도시에서 재회한다. 내겐 익숙하지만 그에게는 낯선 곳. 꼭 함께하고 싶었던 식당에 들러 점심을 먹고 예촌으로 향한다. 일기 예보에 그려진 먹구름은 어디론가 비껴가고 선선한 날씨가 이어진다. 가을의 문턱에서 네 사람이 만난다. 동생은 지루한 듯 뒤따라 걷고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지난여름의 조각에 대해.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이 흘렀을까, 아마 우리에게 남겨진 온도는 다정하거나 찬연하겠지.




익숙한 광한루 산책. 소박하고 싱그러운 여정이 펼쳐진다. 어렸을 땐 미처 몰랐던 것들이 마음에 닿는다. 여름의 초록빛과 기와의 바랜 흔적, 오작교 아래 잉어들, 아주아주 오래된 느티나무. 힘든 줄도 모르고 달리는 아이들을 구경하거나 그네를 탄다. 문득 기억에서 잊힌 어떤 필름이 천천히 재생된다. 그 장면은 너무 아름다워서 시야를 흐리기도 한다. 화면이 옅어지는 찰나에 우리의 모습을 기록한다. 나무의 나이를 헤아리던 순간과 당신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웃었던 시간을.

​광한루를 돌아보고 기차역에 가는 길, 작은 다툼이 벌어진다. 상황은 이랬다. 나는 수섬에 가자고 했고, 그는 전날 친구와 과음을 하느라 다음날 여행이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간 병원에서 쌓인 피로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탓인지,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당신의 긴 휴가를 함께 보낼 수 없다는 사실이 퍽 서운하기도 했고.


해질 무렵 열차 안. 빈은 햇빛이 드는 자리를 피해 등을 돌렸고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울었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르고 잿빛으로 물든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창밖으로 물든 하늘이 분주하게 쫓아오지만, 기차는 느릿느릿 어두운 목적지에 멈춘다. 수십 만개의 별이 어딘가에 반짝이고 있겠지. 내 붉어진 마음에도 어서 환한 빛이 쏟아지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별이 빛나는 밤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