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보내는 마지막 휴가 일기
마지막 휴가와 긴 여름이 막을 내릴 때쯤, 새로운 도시에서 재회한다. 내겐 익숙하지만 그에게는 낯선 곳. 꼭 함께하고 싶었던 식당에 들러 점심을 먹고 예촌으로 향한다. 일기 예보에 그려진 먹구름은 어디론가 비껴가고 선선한 날씨가 이어진다. 가을의 문턱에서 네 사람이 만난다. 동생은 지루한 듯 뒤따라 걷고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지난여름의 조각에 대해.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이 흘렀을까, 아마 우리에게 남겨진 온도는 다정하거나 찬연하겠지.
익숙한 광한루 산책. 소박하고 싱그러운 여정이 펼쳐진다. 어렸을 땐 미처 몰랐던 것들이 마음에 닿는다. 여름의 초록빛과 기와의 바랜 흔적, 오작교 아래 잉어들, 아주아주 오래된 느티나무. 힘든 줄도 모르고 달리는 아이들을 구경하거나 그네를 탄다. 문득 기억에서 잊힌 어떤 필름이 천천히 재생된다. 그 장면은 너무 아름다워서 시야를 흐리기도 한다. 화면이 옅어지는 찰나에 우리의 모습을 기록한다. 나무의 나이를 헤아리던 순간과 당신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웃었던 시간을.
광한루를 돌아보고 기차역에 가는 길, 작은 다툼이 벌어진다. 상황은 이랬다. 나는 수섬에 가자고 했고, 그는 전날 친구와 과음을 하느라 다음날 여행이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간 병원에서 쌓인 피로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탓인지,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당신의 긴 휴가를 함께 보낼 수 없다는 사실이 퍽 서운하기도 했고.
해질 무렵 열차 안. 빈은 햇빛이 드는 자리를 피해 등을 돌렸고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울었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르고 잿빛으로 물든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창밖으로 물든 하늘이 분주하게 쫓아오지만, 기차는 느릿느릿 어두운 목적지에 멈춘다. 수십 만개의 별이 어딘가에 반짝이고 있겠지. 내 붉어진 마음에도 어서 환한 빛이 쏟아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