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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r 03. 2020

우리가 함께 웃고 사랑했던 모든 순간들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떤 순간을 가장 먼저 떠올리시겠어요?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일

저녁 아홉 시쯤, 서랍을 정리하던 동생이 앨범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방에 어질러 놓은 옷가지를 정리해야 했으나 유혹을 참지 못 하고 3층으로 올라갔다. 막내와 함께 앨범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가 자신의 과거를 궁금해하게 된 걸까. 꽤 진지한 표정으로 사진을 들춰보다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기억나지 않는 장면을 내게 묻기도 한다. 분명 수차례 봤던 사진인데도 새로웠다. 엄마와 아빠가 얼마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아 왔는지, 나는 어떤 사람들과 어떤 방법으로 자랐는지. 단상의 조각으로 역사를 이어 붙인다. 그 끝에는 지칠 줄 모르는 이들의 사랑이, 애틋하고 소중한 마음이 녹아 있다.

​가족신문에 적힌 글을 읽는다. 건영이가 태어나고 힘들어했다는 둘째. 그 말에 나의 어릴 적 질투를 떠올린다. 동생의 탄생을 기뻐하다가도 한밤 중에 미역국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는 어느 날의 이야기. 우리는 전쟁 같은 날들을 보냈지만, 결국 함께 승리했다. 그건 엄마와 아빠, 할머니의 무한한 사랑과 신뢰가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 신문을 접고 낡은 앨범을 펼친다. 지금보다 더 젊고 풋풋하던 부모님의 모습들. 엄마는 아빠를 만났을 때 가장 예쁜 미소를 지었고, 아빠는 그런 엄마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오랜 여정을 궁금해하다 눈시울이 붉어진다. 폭풍우를 만나고 위기에 놓여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것에, 결국 모든 일을 함께 이겨냈다는 사실에.



어린 시절의 회상은  여운을 남긴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분명 버튼을 누르기까지 무수한 고민과 주저함이 있을 테다. 하지만 결국 기억 속에서 흐려진 초등학교 시절을 택할  같다. 조금  낭만적으로 표현해서, 세상의 많은 것들을 사랑하기 시작했을 ?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매일 아침 아빠와 산에 오르던 시간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학교에   100원짜리 마을버스를 타거나 학교까지 걸었고, 스티커북에 많은 투자를 하기도 했다. 때로는 불량식품을 사 먹고 남은 용돈을 가위바위보 기계에 쏟아붓기도 했고, 비가 오는 날에는 장화를 신고 물이 고인 길을 신나게 뛰어다니기도 했다. 청개구리를 잡으러  아파트를 돌아다녔던 , 집에 놀러 온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었던 , 밤새 고민해서 가져간 물건을 바자회에 내놓고 뿌듯해했던 , 운동장 놀이터에서 해가  때까지 친구와 땅따먹기를 했던 날, 농구 코트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공을 던졌던 , 저수지를 따라 집으로 이어지는 기찻길까지 산책했던 , 동생과 피아노 학원까지 걸었던 ,  근처에 파는 붕어빵을 사 먹고 소소한 행복을 느꼈던 , 요리 장난감으로 밀가루 칼국수나 음식을 만들었던 ,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고 새로운 친구와 비밀 얘기를 나눴던 , 학원 난로 위에 쫀디기를 구워 먹고 영화 음악을 연습하며 열정을 불태웠던 날들.


그때의 세상을 잊지 말아야지. 모든 이들과 함께 웃고  사랑했던 모든 순간을 기억해야지.




새벽 한 시, 이번에는 먼지가 쌓인 보물상자를 꺼낸다. 그 안에는 대학에서 쓰던 전공 서적과 노트, 그리고 악보 몇 장이 있다. 나의 청춘이 차근차근 펼쳐진다. 미소를 머금은 채 낡은 종이를 넘긴다. 시선이 멈춘 곳은 휴학 계획서가 적힌 페이지. 두려운 마음과 작은 바람이 새벽에 스며든다. 머릿속을 안온하게 채운 장면을 떠올린다. 러시아에서 뮤지컬 보기, 낯선 나라를 방황하며 음악을 듣는 일, 영어와 독일어,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것, 제주도 게스트하우스 스탭, 한라산 등반, 음악 캠프 참가하기. 사랑하는 영화 한 편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다.

매년 12월이면 들뜬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곤 했다. 아마도 환상에 젖어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했던 것 같다. 누군가 말했다. 언어에는 힘이 있다고. 언젠가 우리가 적은 문장은 반드시 이루어질 거라고. 해서 늘 버킷리스트를 만들었고 부푼 꿈을 안고 살아갔다. 여기에는 기적을 보여준 글자들이 서 있다. 그저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현실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몇 해가 지나고, 나는 더 이상 버킷리스트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됐다. 소중했던 삶의  부분을 놓친  아니다. 어떤 소망을 적지 않고도 빛나는 하루를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종이와 펜을  것이다. 상상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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