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캐롤 Mar 04. 2020

천천히 멀리 나아가야지

작은 위로의 말이 희망을 안겨 줄 때,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어느새 대학원 3학기. 평범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눈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연습실에 모여 떠들던 날들, 늘 함께였던 동기들, 얼마 남지 않은 배움의 시간 같은. 마지막 학기만 남겨둔 동기 언니는 말한다. 자주 보자고. 함께 연습하고 함께 밥을 먹자고. 그 말은 곧 그리움으로 번진다. 해서 우리는 이제 사소한 것까지 전부 마음에 담는다. 예를 들면 학교 축제에서 파는 음식을 먹고 연습실에 간 어느 밤, 피아노 앞에서 울던 날들. 이런 시간은 훗날 우리의 추억 상자에서 여러 번 꺼내어질 테다.


한 때는 여유로운 동생이 부러웠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 요가를 하거나 밥을 먹고 음악을 들었다. 눈을 뜨면 곧장 연습실에 갔던 나로선 그 장면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지금, 나는 과거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기상 후에는 운동장에 나가 달리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간단한 아침을 차린다. 치열했지만 조금 어리석었던 젊은 날을 반성하면서. 대신 등교시간이 조금 늦어졌다. 빈 속으로 학교에 가는 일은 거의 없을 정도니까.

​화요일 오후. 연주가 끝나는 순간 관객의 한숨이 공중으로 흩어진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간 내가 쏟아부은 시간이 물거품이 되고 만 것. 하마터면 바다 깊이 가라앉을 뻔했으나 간신히 물 밖으로 헤엄쳐 나온다. 나의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악보에 그려진 모든 음에 생명을 부여해야 한다고. 음악은 언어와 같다. 이를 테면 단어와 단어가 만나 문장이 되는 일. 여기에 어떤 글자가 빠지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연주를 할 때 우리는 단 하나의 음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수많은 음표가 잘 섞여 깊은 울림을 내야 비로소 음악이 완성되는 것이다. 물론 완벽한 시간 예술이라는 건 없지만. 문득 실패가 고맙게 느껴졌다. 지난 일주일이 오늘의 동력이 되어준 걸 테니.


늦은 저녁, 로로네집 커피룸. 네 사람이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눈다. 우리의 주제는 사랑과 흘러가는 날들이 된다. 내 이야기는 조금 어두운 편. “벌써 몇 년째 같은 말만 듣고 있어요. 조금만 더. 근데 이제는 두려워요. 어쩌면 저는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것보다, 뛰어넘기 힘든 벽에 부딪쳐 괴로운 걸지도 모르거든요.” 친구는 내 상황에 깊이 공감하고 그녀의 남자 친구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다는 건 포기하라는 게 아니라 희망을 가지라는 말 같은데요? 지금까지 해온 끈을 놓치지 말라고, 계속 나아가라는 뜻이 아닐까요?” 그 말에 작은 도전과 열기가 피어난다. 그렇게 따뜻한 시간이 쌓인다.


하루의 긴 부분을 보내고 다시 학교로 향한다. 반복되는 생활에 단비 같은, 한 줄기 빛이 되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함께 웃고 사랑했던 모든 순간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