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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r 05. 2020

나의 화양연화

사랑하는 것을 눈물 없이 떠나보낼 수 있을까?

학기가 시작된   달이 흘렀다. 이제 감이 잡힐 법도 한데, 나는 여전히 악보의 늪에서 헤엄치고 있다. 쉼표 없는 위험한 음악을 계속하고 있다는 . 팔을 저어 나아가지 않으면  물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챈 청중이 도움의 손길을 건넨다. 그는 말한다. 내가 수많은 음표에 치어 다칠까 걱정이 된다고. 그러니  곡은 이쯤에서 그만두는  좋겠다고. 다정한 목소리 옆으로 눈물 자국이 번진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슬픈 마음을 부정하는  불가능했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지킨 시간이 너무 쉽게 사라지는  같아서. 아마 하늘이 무너진다면 이런 기분이겠지. 사랑하는 것을 눈물 없이 떠나보낼  있는 날이 오긴 할까?


연습실에 있을 때 즐겁냐는 질문에 입을 다문다. 두려움과 한숨을 가득 안고 지냈던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 하지만 힘들기만 했던 건 아니다. 나는 자주 빛나는 무대를 상상했으며 정상에 오를 날을 기대했다. 걱정과 의심을 모른 체하고  모든  쏟아내리라, 다짐하면서. 그러나 작은 불씨는 타오르기도 전에 재가 되어 허무함을 안겨주었다. 그토록 원했던 곡과 이별하게 되었으니. 침대에 누워 아른거리는 문장을 곱씹는다. “가는 실에 몇 개의 진주알을 촘촘히 엮어 목걸이를 만드는 일을 생각해 봐. 좋은 소리를 내는 방법은 이런 거야.”





일주일이 흘렀다. 하루의 많은 부분을 연습실에서 보냈다. 이토록 치열했던 날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자정 무렵 경비아저씨와 함께 퇴근하고, 눈을 뜨면 다시 학교였다. 천천히 과거의 나를 떠올린다. 기억 속의 비디오테이프를 수도 없이 되감기 하다 멈춤 버튼을 누른다. 작곡과 한 학기 연주를 맡은 걸로도 모자라 열 개나 되는 반주를 하고 콘체르토와 여덟 개의 가곡을 준비했던, 눈물과 위기로 성장했던 한 시절을.


새벽빛에 졸음을 흘려보내고 페퍼민트 차를 마신다. 온몸에 피어난 열기를 건반 위로 쏟아낸다. 이따금 보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을 헤아리거나 가고 싶은 섬을 상상한다. 무모한 도전을 시작했다는 . 어쩌면 소중한 것들과 잠시 멀어져야 하는 . 밤 열 한시,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차라리 눈물을 모아 강을 건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피아노 덮개 위에 엎드려 울던 중, 문 두드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리허설을 마친 교수님이셨다. “완벽한 무대는 없어. 서두르지 말고 조금씩.” 여느 때와 같은 다정한 위로에 평정심을 되찾는다. 오늘의 교훈, 허술한 빈틈마저 사랑할 . 완벽하겠다는 마음으로 달리지  . 천천히 멀리  .



10 15. 사랑하는 나의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강한 의사를 꺾지 못하겠구나,라고 말이다.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위태로운 마음은 평화에 기울었으나   산이 기다리고 있다. 집을 나설 때면 작은 책을 가방에 넣는 대신 악보를 챙긴다. 버스를 타면 오래된 팝송 대신 첼로 소나타를 듣는다. 이번 학기가 끝나면 어떤 기분일까. 스물네 살의 여러 장면은 가장 천천히 희미해질 테다. 나는  뜨거운 계절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막히는 생활에 지쳐 엉엉 울기도 하고,  읽지 못한 악보에 겁을 먹고 자주 걱정거리를 늘어놓곤 했지만. 위기를 만날 때마다 이렇게 기도해야지.  긴긴 전쟁을 씩씩하게 감당할  있는 힘을 주소서. 역경과 실패를 만나도, 결국 아름다운 꽃을 피워낼  있게 하소서.

어쩌면 지금이 나의 화양연화일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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