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캐롤 Mar 06. 2020

짙은 그리움에 전하는 말

다가올 모든 날들이, 저마다의 시간이 아름답기를 바라며


집으로


문득 멀리 있는 가족들이 그리워져 엉엉 울었다. 사실은 그 핑계로 힘든 마음을 털어낸 걸지도 모른다.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고 야식을 먹는다. 올리브 치즈 치아바타 조금, 고구마 반 개. 다음날 아침 거울을 볼 자신이 없지만, 먹는 행위를 중단하지 못한다. 다음부턴 절대 밤에 울지 말아야지.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렸더니, 그는 라면을 끓일 거라고 말한다. 우리의 통화는 영상으로 전환되어 한밤의 파티가 된다. 김 셰프는 요리의 현장을 빠짐없이 녹화하고, 갑자기 방청객이 된 나는 침을 삼키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다. 얼마 후 식탁에 냄비와 콜라가 올려진다. 남자는 버섯과 고기를 보여 주더니 면발을 호로록 빨아들인다. “오빠, 왜 고구마에서 라면 맛이 나지? 혹시 라면은 이상 없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어휴, 얄미워.


이번엔 엄마다. 수화기 너머로 꼬물이들의 근황을 묻는다. “많이 컸어? 집에 가서 확인해야지.” 그녀는 말했다. “얼마나 예쁜지 몰라. 진짜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꽤 오랜 시간 강아지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했던 엄마가 들뜬 목소리로 사랑을 전한다. 나는 그 말에 웃으며 이렇게 답한다. “아, 진짜! 안 되겠네. 얼른 갈 테니까 애들 못 크게 막고 있어.”

엄마 아빠가 이런 기분이었겠지.
하루하루 소중하고 아쉽고, 또 사랑스럽고.


사랑하는 이들 생각에, 차곡차곡 쌓인 그리움을 어쩌지 못해서 불을 켜고 밀린 일기를 쓴다. 사진첩을 열어 보고 싶은 얼굴과 앞마당 식구들을 꺼낸다. 곧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지. 댕댕이들의 작은 발바닥이 커지기 전에 어서 짐을 챙겨야지.




집으로 가는 길. 햇살이 쏟아지는 버스 안에서 악보를 읽고, 편의점 테라스에 앉아 프랑스 음악 용어를 검색한다.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지만, 교통편이 열악한 시골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 결국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알린다. 그녀의 마중으로 안전히 집에 닿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할머니에게 웃으며 인사하고 블루베리 밭으로 달려간다. 두부와 흑이, 그리고 작고 사랑스러운 생명체들이 보인다. 우리 남매는 마당에 모여 6마리를 품에 안는다.

돌 위에 앉아 동생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금세 쌀쌀해졌다. 거실에서 과일을 먹고 2층으로 올라간다. 방 안에는 그녀의 배낭과 옷가지가 널려 있다. 우리는 밤늦게까지 옷장을 정리했다. 다음날 오후, 이미 차려진 식탁 옆에서 외식을 하자는 할머니를 겨우 말려 함께 점심을 먹는다. 할머니가 나가자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9월에 한국으로 돌아와 한 달 반 동안 집에 머물었던 동생이 다시 호주로 떠나게 됐기 때문. 그렇게 2019년의 마지막 만찬을 누린다.

가을의 끝 무렵, 여행 중이던 동생에게 지난 일을 전해 듣는다. 할머니가 꽤 많이 울었다는 것.

​동생이 뉴질랜드로 떠났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온 가족이 모여 침대 위에서 편지를 쓰고 동생의 안부를 궁금해하던 그때, 나는 그녀의 부재를 쉽게 받아들일  없었다. 비밀 얘기를 하거나 늦은 밤까지 수다를  사람이 없다는  어린 나에게 크나큰 슬픔이었으니. 소파 위에 뒤엉켜 몸을 맞대고 각자 할 일을 하는 장면이나 식탁 위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서로를 그리워하는 짙은 시간 같은 것들이 번졌다.

​다가올 모든 날들이, 저마다의 시간이 아름답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화양연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