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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r 07. 2020

좋은 계절엔 조금 게을러도 돼

인생에서 꼭 필요한 것, 적당한 휴식과 사랑하는 이들

피로와 나른함이 밀려드는 일요일 오후, 곧장 집으로 돌아와 눈을 붙인다. 해야 할 일을 모른 체하고 휴식을 누리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딱 한 시간만 자야지. 마음속으로 외쳤던 주문은 알람과 함께 증발해버린다. 결국 깊은 밤이 되어서야 눈을 뜬다. 세수를 하고 화장대에 앉자 몇 달에 걸쳐 읽고 있는 책이 시야에 잡힌다. 이렇게 좋은 계절에,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책장을 펼친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 아, 그럴 수도 있겠다. 끝까지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면 될 일이겠구나.





음표의 늪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게 될 무렵, 가을에게 작별을 고한다. 얇은 옷가지를 정리해 옷장 꼭대기에 올려두고 겨울 옷을 꺼낸다. 새벽과 오후의 기온차 탓에 옷장 앞에서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곤 한다. 양털 점퍼를 입고 학교로 향한다. 복도 끝에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그는 부드러운 빵을 한 조각 건넨다. 미소로 감사 인사를 대신하고 악보를 꺼낸다. 익숙한 소리가 들리는 연습실 안. 피아노 앞에 앉은 언니가 연습을 멈추고 말한다. 함께 출발했던 친구들이 흩어져 톨게이트를 지나고 있는 동안, 그녀는 제1휴게소에서 혼자 우동을 먹는 것. 마지막 학기의 의미는 이런 거라고. 문득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시간이 흐르고, 학교 밖을 나가면 너희는 지금 이 시절을 아주 그리워하게 될 걸?”

나쁜 꿈에서 깨면 늘 마음이 분주해진다. 또 누군가와 추격전을 벌여야 될까 봐 두려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금방 평정심을 되찾는다. 이른 아침 나를 찾아온 당신의 따스한 손길과 위로 덕분에. 느지막이 점심을 먹은 후 차분한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여유와 고요가 마음에 깃든 오후. 실로암 정원의 물소리를 듣기 위해 창문을 열어 둔다. 1악장 끝 부분을 천천히 읽는다. 음표가 손에 익을 때까지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마음에 드는 소리를 찾는다. 마지막 마디, 그토록 기다려온 순간을 만난다. 9월부터 지금까지. 꼬박 두 달이 걸렸다. 이제는 정원을 가꾸어야 할 때. 충분히 노래하고 즐겨야지. 두려움을 떨쳐내고 천천히 걸어 나가야지.

연습을 마친 이른 오후에는 세종으로 향한다. 은빛으로 물든 달은 키 큰 나무들을 따라 달리고 강가 위로 일몰이 내린다. 저녁 여섯 시, 미즈 컨테이너. 식탁에 모인 여자들이 돌아가면서 발언권을 얻고 입을 연다. 이때 청중의 역할은 음식을 먹으며 귀를 기울이는 것. 파스타 그릇이 비워지고 모두 포크를 들지 않을 때쯤 자리를 정리한다. 다음 장소는 발렌시아 카페. 케이크를 꺼내기 위해 테라스로 나간다. 우리가 함께 보내는 여섯 번째 생일. 책을 넣은 쇼핑백을 건넨다. 생일자의 미소는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긴다. 케이크와 뜨거운 커피, 그리고 여러 명의 다정한 언어가 밤을 가득 채운다. 수다를 이어갈 체력은 충분했지만, 카페 마감 시간이 다 되었다는 말에 몸을 일으킨다. “다음 모임은 예은 언니 리사이틀이지?”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오랫동안 따스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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