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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r 09. 2020

사랑을 담아, 나에게 보내는 편지

지구의 시간은 둘로 나뉜다. 무언가를 사랑할 때와 두려움에 떠는 순간.

잉크가 마른 종이 한 면에 숨을 불어넣는 일을, 오래된 시간을 더듬는 일을 좋아한다. 이제는 낡거나 해진 악보를 품에 안는 것, 또 낯선 음표들이 전부가 되기도 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피아노 앞에 앉는다. 하지만 소중한 마음은 생각지도 못한 일로 구겨지고 만다. 책상을 잘못짚어 손가락을 다친 것. 누군가 내 열정에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었다. 긴긴밤을 보내고 405호를 찾는다. 나의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이 기회다. 왼손만 연습하자.”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악보를 펼친다. 오른팔을 의자 위에 얹고 베이스의 선율을 느끼다 보면 금세 소리에 취하게 된다.

소중한 동기의 연주 날. 떨리는 마음으로 객석에 앉는다. 그는 늘 그래 온 것처럼 찰나를 즐긴다. 그 시간은 무대 위로 번져 따뜻한 장면이 된다. 어쩌면 연주자는 항해사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넓은 바다에서 암초를 만났을  눈을 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혜롭게 위기를 모면하는 사람도 있다. 후자는 거센 파도를 만들기도 하고,  물결을 다스리기도 한다. 모든 음이 한데 섞여 숨을 쉬는 순간,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결국 청중을 압도하는  온전히 연주자의 몫이다.


나는 이런 순간들을 사랑한다. 떨림이 전해지는 무대의 영원 같은 밤과 음악이 시작되는 찰나를.



3학기의 마지막 레슨 날,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작은 소리와 큰 소리를 낼 때 발레리나의 몸짓을 기억하라고. 우리는 건반의 울림이 사라지지 않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들이 발을 세운 채 흔들리지 않는데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지금까지 들은 것 중 가장 좋다. 오늘의 안정된 소리와 템포를 기억해.” 진주 목걸이와 발레리나. 아름다운 배움은  찬란하고 눈부신 .


건반 위로 펼쳐진 빛의 향연. 파스텔 색감이 옅게 드리우는 그림자를 보며 카메라를 켠다. 머지않아 나는 이 시간을 그리워하게 될 테니. 건반의 울림과 투명한 소리, 창가의 햇살, 얇은 온기를 담는다.

50페이지의 긴 부분이 막을 내리는 시점. 너덜너덜해진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며 다짐한다. 후회 없이 모든  쏟아부었던 지금을,  시절을 잊지 말아야지. 시간이 흘러도  부시게 빛날  청춘을 기억해야지. 중도포기를 선언할 뻔했지만, 눈물로 지새운 날들은 지친 마음을 일으킨다. 겨울의 문턱에서 고비를 견뎌낸 꽃이 강인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활짝 피어난 . 설령 예기치 못한 상황이나 폭풍우를 만난다고 해도, 나는 계속해서 화단을 가꾸고 물을  것이다.



분주한 한낮을 보내고 피아노 앞에 앉는다. 옆에 있는 후배는 말한다. “누나는 단단한 뭔가가 있어요. 겉모습만 보면 절대 그런 소리를 못 낼 것 같은데, 피지컬을 뛰어넘는 느낌이 들어요.” 그 말에 용기를 얻고 시험장으로 들어간다. 지난 시간을 기억하는 두 손에게 모든 걸 맡기기로 한다. 어설픈 소리와 깊은 소리가 번갈아가며 무대를 울린다. 그리고 나를 가장 괴롭히던 페이지. 마음이 불안을 외치는 동안 손가락도 힘을 잃는다. 결국 가장 기대했던 1악장에서 넘어지고 만다. 그로 인해 또 하나의 교훈을 얻는다. 두려움이 사라질 때까지 연습할 것, 더 안온한 상태로, 침착하고 담대할 것.

종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후 여섯 시,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분명 후회 없이 연습했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도대체 내 눈물샘은 언제쯤 마를까. 위로의 말을 건네는 언니들에게 애써 웃으며 인사한다. 인생은  예상치 못한 일의 연속이지만, 여기서 행복을 찾는  우리의 몫이 아닐까?


지구의 시간은 둘로 나뉜다. 무언가를 사랑할 때와 두려움에 떠는 순간. 나는 몇 계절을 보내는 동안 사랑에 빠져 매 순간 뜨거웠고 가끔은 열병을 앓았다. 그리고 그 끝에는 어둠이 있었다. 어느 것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 소중한 것들을 지키려는 마음과 고요 사이에서 걸어 나온다. 이제 긴장을 풀고 찰나를 누려야지.





긴긴 한 해의 막을 내리며,
사랑하는 나에게 쓰는 편지

어제는 사랑하는 친구를 만났어. 마냥 어렸던 성식이는 어느새 훌쩍 커서 우리를 차에 태웠고, 우리는 달 다방에 가서 뜨거운 커피를 마셨어. 가게 문을 닫는 밤 열 시. 못다 한 말이 너무도 많았던 두 여자는 추운 줄도 모르고 밤길을 걸었어. 중학생 때 만난 우리가 사랑을 논하고 더 나은 삶을 고민하다니. 어딘가 어설프긴 한데,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거야. 그 시간이 얼마나 달콤했는지 몰라.

사계절이 흐르는 동안 섬과 설국,  벚꽃이 흐드러진 봄의 도시와 여름 바다, 그리고  계절의 교정에서 보낸 날들. 아마도 나는 올해의 작은 조각들을 절대 잊지 못할 거야. 어느 때보다 뜨겁게 살아낸 이 시절은, 먼 훗날 내 청춘의 한 페이지를 반짝반짝 빛내고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계속 꿈을 꾸면 돼.  정든 것들과 이별하고, 낯선  위에서 헤매게 되겠지만. 지금보다  단단한 마음으로 세상을 마주하면서,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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