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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r 03. 2020

서로에게 물드는 시간

오래되고 익숙해져도 다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당신과 떨어져 있는 동안 바쁜 날들을 보낸다. 안부를 묻거나 서로의 목소리를 듣는 일로 그리움을 달래면서. 그러다가도 기억의 밑바닥에 있는 나쁜 감정에 사로잡혀 마음을 앓기도 한다. 최근에 있었던 다툼이 짧게 스친다. 해서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한다.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를 꺼내자 그가 말한다. “너네의 연애는 지금부터 시작인 거야.  등산 좋아하잖아.    발맞춰서 올라가. 아니면 퍼즐 조각을 맞춘다고 생각해.”


햇살이 드는 창가에 앉아 고개를 끄덕인다. 가장 어긋난 조각부터 맞추기로 했다. 생각을 다듬고 대화를 시도한다. 내가 만들고 싶은 사랑의 모양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의 매듭을 설명한다. 그러자 그는 말한다.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우리는 이제껏 서로 다른 방법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함부로 간섭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일이 지나친 배려가 되었던 . 긴긴 대화 끝에 깨닫는다. 눈물과 수많은 시행착오는 결코 불필요한  아니라는 사실을.




목요일 오후. 오랜만에 구두를 신은 탓일까, 몸의 움직임이 뻣뻣하다. 높은 굽을 신고 우아하게 걷는 여자들을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과연 하이힐이 편해지는 날이 오긴 할까? 건물을 나오자마자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구두에 적응하지 못한 발이 비명을 지른다. 옆에 있던 남자는 택시를 잡고 발을 주물러준다. 그는 걱정 어린 목소리로 괜찮냐고 묻더니 눈썹을 찡그린다. 앞으론 편한 신발을 신고 나오라는 뜻. 택시는 영화관 앞에 멈춘다. 우리가 선택한 작품은 ‘가장 보통의 연애’. 스크린에 낯익은 배우들이 등장하면서 누군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벽을 쌓는 여자와 실패해도 또다시 사랑에 빠지는 남자. 그들은 빠른 속도로, 어쩌면 천천히 서로에게 물들어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꽃이 만발하고 많은 관객의 행복이 나란히 퍼진다. 타인의 연애 속에서 우리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사랑의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어쩌면 사랑하는 이들의 뜨거운 마음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고.

영화관에서 나와 공원으로 향한다. 분홍빛 물결 옆으로 가을 소풍을 나온 사람들이 보인다. 우리는 그 행진에 섞여 아름다운 저녁나절을 누린다. 해가 모습을 감추려 할 때쯤, 은은하게 반짝이는 눈부신 것들이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문득 당신이 곁에 없는 삶은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까진 뒤꿈치에 밴드를 혼자 붙이고, 늦은 밤의 귀가를 두려워하며 변하는 계절을 홀로 누렸을, 그런 날들이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연습실이 아닌 다른 동네, 먹고 마시고 사랑하며 얻은 당신과 나의 하루. 소중한 가을의 시간을 기억해야지. 지는 해와 강가 위로 내린 물안개, 그 곁에서 넘치는 빛을.




눈부신 오후, 책 두 권을 들고 연두색 소파에 몸을 누인다. 책상에는 햇살이 내려앉고 곧 사랑스러운 쿠션이 배달된다. “오늘은 왜 여기로 왔어?” 미소를 머금고 그의 몸에 기댄다. 해야 할 일을 어느 정도 끝낸 뒤에는 소박한 행복을 누린다. 바로 지난 드라마를 돌려 보는 일. 화면 속 두 사람은 얼굴을 붉히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그들이 사랑에 빠지는 장면은 우리의 과거를 떠오르게 한다. 회상에 잠긴 채 희미해진 감정을 꺼내자 그가 말한다. 우리의 만남이 아직도 실감 나지 않는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는 눈빛을 보내자 따뜻한 말들이 공기 중으로 피어오른다. “내 경우는 좀 달라. 음, 그러니까 매일 생각하던 게 현실이 된 거지. 너는 내 꿈이었어. 나는 꿈을 이룬 거야.”


산책로를 걷는 단란한 가족들을 보고 미소 짓는다. 내 걸음 속도가 느려졌다는 걸 알아챈 그가 묻는다. “발 아프구나?”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잡는다. 화려함 너머에 보이는 초록빛에 이끌려 멈춰 선다. 작은 숲과 당신이 있는 곳. 거기서 우리는 조금 더 멀리, 깊이 사랑을 내비칠 수 있다. 마음 그릇은 어느새 당신의 말로 채워져 온기가 가득하다. 빈은 하늘이 익었다고 외친다.


저녁나절, 잎이 마른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수목원을 나선다. 출구를 벗어나 아름다운 밤을 만난다. 구름에 싸인 달이 환하게 저녁을 밝히고 높은 소나무가 거리를 지키고 있는 곳, 거기에 우리가 있다. 당신이 묻는다. “달 따다 줘?”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곤란한 듯 대답한다. 생각해보니 그건 불법이라고. 전 세계 사람들과 아름다움을 같이 나누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이다. 글자의 조각이 따뜻한 날을 만든다. 벅찬 감정을 어쩌지 못하고 뜨거운 글자를 쏟아낸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마음을 무슨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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