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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r 01. 2020

긴 사랑의 역사를, 당신에게

나는 이 모든 순간을 잊지 않을 거야


우리가 다시 사랑에 빠진 순간
이번에는 애틋함이 아닌 편안한 마음이 차오른다. 아무렇게나 머리를 묶고 얇은 겉옷을 걸친 채 익숙한 동네를 걷는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치킨을 주문하는 일로 소박한 데이트가 시작된다. 가을바람에 섞여 긴긴 사랑의 역사를 기억해내는 밤. 서로의 미소에 취한 채 대화를 이어간다. 이 모든 건 우리의 정원에 또 다른 꽃을 피운다. 매미 소리가 사라져 갈 때쯤, 밤 산책에 나선다. 분홍빛으로 물든 배롱나무를 지나 그네 의자에 앉는다. 아마도 저녁 아홉 시. 가로등 아래 빛바랜 기억이 일렁인다. 사랑하는 작가의 책을 품에 안고 물소리를 듣던 어느 여름, 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보고 변한 계절을 실감하던 날, 추위를 핑계로 당신 옆에 꼭 붙어 김밥을 먹던 밤. 회상에 잠긴 두 사람은 진실한 눈빛을 나눈다.


3년 전 겨울, 그리고 지금.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아마 우리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이겠지.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말한다. “그땐 가까이 가지도 못 했는데. 내가 니 허리에 손을 올리다니.” 두 해가 바뀌고 다시 학교에서 만난 우리. 매일 봐도 보고 싶은데 어떻게 그 긴긴 그리움을 견뎌냈을까. 지난 시간은 더 큰 행복을 안겨준다. 같은 건물에 있는 당신의 안부를 확인하고 싶고, 날씨가 좋을 때면 함께 연습실을 뛰쳐나가고 싶은 게 문제지만. 우리는 오늘도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캠퍼스 커플의 특권을 누린다.

​오후 다섯 시, 생일 때 받은 기프티콘으로 치킨을 먹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수업을 하는 동안 복학생 오빠는 연습실에 남아 악보를 읽는다. 장소는 교지 베란다. 치킨을 받고 계단을 오르는 우리에게 미소가 넘친다. 피크닉을 준비하는 동안 해가 진다. 가을이 왔다는 분명한 증거는 밤이 길어졌다는 것. 아무런 걱정 없이 당신과 함께 일몰의 순간을 누리는 일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가장 가까이 있는 음대 건물에서 브루흐 바이올린 소나타가 흐른다. 희미한 선율에 매료되어 밤공기를 한껏 들이킨다. “노을이 아주 아름다운 날에 여기에 왔어. 해가 지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가장 높은 곳을 찾고 있었거든. 한 번은 수업 도중에 몰래 나와서 이 자리에서 라면 먹은 적도 있고.” 작은 비밀을 꺼내어 수줍게 웃는다. 그것으로 우리의 밤은 막을 내린다.


이제 더 많은 날들을 함께 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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