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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y 26. 2019

맥주를 쏟아도 괜찮은 밤

세 번째 나라, 체코에 도착하다

체코행 버스를 기다리던 밤, 옆에 앉은 작은 남매에게 인사를 건넨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다니엘라와 아드리안. 그들은 씩씩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한다. 얼마 후, 아이들은 자판기 앞을 서성이더니 아빠에게 과자를 사달라고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작전은 실패로 끝난다. 작은 남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자, 아빠는 껌을 나눠준다. 껌 하나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는 천사들. 만나서 반가웠어-!





세 번째 나라, 체코. 기사님이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운전해주시길 바랐건만, 프라하에 도착한 건 예정보다 이른 새벽 4시 40분이었다. 터미널 근처에 있는 가게들은 전부 굳게 닫혀 있었다. 한국처럼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이나 카페가 있으면 좋을 텐데. 아아, 다음에는 밝은 아침에 도착하는 야간 버스를 타야지. 하는 수 없이 신시가지를 향해 걸었다. 체크인까지 남은 시간은 열 시간 정도. 유일하게 영업 중인 맥도널드로 향했다. 맥너겟을 입에 털어 넣고 일기를 쓰려는데 잠이 쏟아졌다.






날이 밝자 고요했던 프라하에 활기가 내렸다. 근처에 있는 상점에 들러 뜨르들로를 샀다. 체코에 무사히 도착한 기념으로 이 나라 전통 음식을 먹는 일, 꽤 의미 있는 것 같다. 달콤한 맛이 희미해질 때쯤 하벨 시장에 도착했다. 골목에는 뜨르들로를 먹는 관광객들이 있고, 꽃집에는 아름다운 식물들이 늘어져 있다. 시장을 구경하다 걸음을 멈춘 곳은 과일 가게. 건강한 음식들이 가판대 위에서 반짝반짝 빛난다. 체리와 바나나, 블루베리, 사과, 딸기, 오렌지. 가난한 여행자는 고민 끝에 여러 과일이 담긴 컵을 선택한다. 아무래도 프라하에 있는 동안 자주 이곳을 찾게 될 것 같다.






시장에서 나와 꽃길을 걸었다. 체코의 정원은 어떨지 궁금해져서 구글맵을 켠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건, 프란티슈칸스카 정원. 지도에 의지해 겨우 목적지에 도착한다. 미로 같은 길을 따라 걷자, 동화에서나 볼법한 풍경이 펼쳐진다. 하얀 벤치에 앉아 젤라토를 먹거나 신문을 읽는 사람,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정원을 산책하는 프라하 주민들. 그들의 모습에서 평화가 비쳤다.





오후 다섯 시쯤, 숙소로 향했다. 한식이 먹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한인 민박을 예약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의 가지볶음과 계란후라이가 생각난다. 방에 들어가 짐 정리를 하는데, 스태프 언니가 방문을 두드린다. “저녁에 삼겹살 파티할 건데, 참가하시겠어요?” 안 그래도 며칠 전부터 고기가 먹고 싶었는데, 밥도 제공된다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잔을 비우고 소소한 대화를 이어간다. 거실에 모인 이들 중에는 아빠와 함께 여행을 온 착한 아들도 있었다. 아저씨는 멋쩍게 웃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래도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가장의 역할이 많이 줄어드는 건 사실이죠. 그래서 이번엔 엄마 대신 제가 왔습니다.” 어쩐지 그 말에 울컥해져서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 아빠도 함께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넓은 세상을 함께 걷고 누렸으면 더없이 행복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빠에게 전화를 할까 했더니, 한국은 새벽 1시였다. 좋은 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쓴 그리움을 삼켰다.






저녁을 먹은 후, 파티에 참가한 모든 인원이 비셰흐라드로 향했다. 스태프 언니는 일몰을 놓칠 것 같다며 달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숨을 헐떡이며 그 뒤를 쫓았다. 계단을 오르고 가파른 언덕을 지나 도착한 비셰흐라드. 해가 지는 동안 우리는 사랑과 여행에 대해, 각자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순식간에 어둠이 내리고 도시 전체에 밝은 빛이 퍼졌다. 프라하의 야경은 눈부셨다. 맥주를 쏟는 바람에 가방과 지갑이 전부 젖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숙소로 돌아온 밤, 흥미로운 토론 주제에 밤이 깊도록 떠들었다. 긴 토론 끝에 찬성편과 반대편 모두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야간 버스에서 쪽잠을 자고 새벽에 4시에 일어나서 다음날 새벽 4시까지 깨어 있을 줄이야. 나는 아마 로션을 바르는 일도 잊고 침대에 누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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