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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y 28. 2019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게 뭘까?

인스브루크 설경에 마음을 빼앗긴 두 청춘, 계획에 없던 트레킹을 시작하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깨어 잘츠부르크의 산뜻한 공기를 들이켰다. 연우는 산에 간다고 했고, 산을 사랑하는 나는 두 눈을 반짝였다. 목적지는 인스브루크. 준비를 마치고 중앙역에 도착한 우리는 케밥 가게로 향했다. 장기 여행자들의 하루에 가장 중요한 임무가 시작된다. 저렴한 가격으로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을 찾는 것. 예를 들면 가성비 좋은 케밥 같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기차에 오른다. 배가 고팠던 우리는 테이블이 있는 좌석에 앉자마자 케밥을 꺼냈다. 대자연이 막 펼쳐지는 창밖의 세상에 감탄하면서.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티켓을 보여달라는 승무원 아저씨. 웃으며 티켓을 건네었으나 못마땅한 표정으로 추가 요금을 청구한다. 안 그래도 비싼 인스브루크행 티켓에 벌금까지 내게 될 줄이야. 애꿎은 케밥을 원망하며 돈을 지불한다. 그러는 동안 배고픈 하이에나는 식사를 마쳤고 나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 잘츠부르크 비 온다던데.”
“괜찮아. 내가 가는 곳은 무조건 쨍쨍해. 누군가 나에게 태양의 은총을 내렸는지, 가는 곳마다 날씨가 아주 좋거든.”






열차에서 내리기 전까지는 연우의 근거 없는 주장을 가볍게 무시했지만, 인스브루크는 신기할 정도로 맑았다. 붐비는 매표소, 왕복권을 끊고 정상으로 오르는 케이블카를 기다린다. 아무것도 모른 채 노르트케테에 가겠다고 나선 나는 그의 뒤를 따랐고, 우리는 케이블카에 탄 다수의 움직임에 섞여 산 정상에 도착했다. 해발 2,300m, 설산에 혹해 찾아온 노르트케테. 산악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추위가 엄습했다.






십자가를 지나 다른 산맥으로 발길을 돌린다.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돌계단을 천천히 오르는 손자의 모습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한국에 돌아가면 할머니에게 이 넓은 세상을 보여 드려야지. 끝없이 펼쳐지는 눈길과 찬란한 풍광에 눈을 감았다. 시야가 차단되면 다른 감각은 몇 배로 발달한다. 눈길에 남는 발자국 소리, 알 수 없는 언어와 행복한 웃음소리, 그리고 살에 닿는 바람. 고요 중에 천천히 눈을 뜬다. 잠시 무뎌진 마음에 벅찬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연우야, 눈 감고 1분만 세 봐.”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눈을 뜬 공대생은 이렇게 말한다. “와. 우리 진짜 멋진 곳에 있구나.”





바람이 불지 않는 곳으로 내려와 몸을 녹인다. 썬비치에 앉아 노래를 들었을 뿐인데, 햇볕을 받은 몸은 금세 뜨거워진다. 할 수만 있다면 늦은 밤까지 피톤치드를 마시고 싶었으나 우리는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이런 그림 같은 곳을 저버리는 건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 좀 걸을래?” 그는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헤아릴 수 없는 산맥과 무성한 나무들, 그 옆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쉴 새 없이 소리를 질렀다. “뭐 5걸음 1 감탄이야?” 도저히 입을 다물 수 없는 풍경이 계속됐다. 100유로가 넘는 돈을 기차에 쏟아부었지만 전혀 아깝지 않은 노르트케테. 이곳은 내 하루를 온전히 보내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한참을 걷다 풀을 뜯는 염소 무리를 만난다. 그 뒤로 이어지는 내리막길, 생각보다 경사가 심해서 겁을 먹는다.






트레킹을 시작한 지 두 시간쯤 흘렀을까, 케이블카 정차역이 보이지 않자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주위에는 온통 눈 덮인 산이었다. 스니커즈를 신고 돌밭을 걸었더니 발바닥이 욱신거렸다. 쓸데없이 무모한 결심을 한 죄로 벌을 받는 걸까? 점심도 먹지 않은 채로 엄청난 칼로리를 소모하려니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아침에 먹다 만 케밥을 나눠 먹기로 한다. “인스브루크는 절대 잊을 수 없겠다.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그건 니 결혼식이 있는 날일 것 같은데, 축의금 대신 케밥 넣어 놓을게. 나인 줄 알아.”





방향을 알 수 없는 길에는 솔직함이 필요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삶의 선택에 기로에 설 때, 내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 확인하라는 소리였던 것 같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글맵을 켜자, 멀리 떨어진 곳에 도시가 표시된다. 체념한 채 다시 걸음을 옮긴다. 한참 후 우리 앞에 나타난 케이블카 정차역. 드디어 원점으로 돌아왔다. 뒤를 돌아보니 우리가 걸어온 가파른 길이 보였다. “인디언들은 먼 길을 걸을 때 꼭 뒤를 돌아본대. 자기가 얼마나 움직였는지 모르고 걷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또 하나의 큰 장벽을 넘어선 기분이 들어 그저 감사했다. 연우는 우리의 우연한 만남을 후회하는 것 같았지만.


배가 고팠으나 곧장 잘츠부르크행 기차에 올랐다. 어제 먹은 김치찌개가 아른거렸기 때문.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녹초가 된 채 휴식을 가졌다. 얼마 간의 적막이 흐르고 나는 말했다. “365개의 질문에 답을 쓰는 다이어리가 있는데, 이번 질문은 유난히 어려워서 한 글자도 못 적었어.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게 뭘까?”
“음, 너한테 많은 영향을 주는 걸 생각해봐.”







어제 우리가 만난 한식당에서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여전히 엄마의 가지볶음과 계란말이가 그리웠지만 오늘은 뭘 먹어도 감사할 자신이 있었다. 고단한 여정을 마친 의지의 한국인들은 행복한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을 볼 때 좋은 기운을 얻는 것 같아. 근데 타인에 의해 나다움을 찾는 게 가능한 일인가?” 그는 말했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허기를 달래자 나른해졌다. 잘츠부르크에서 보낼 날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에 슬퍼졌지만, 인스브루크의 여운을 남기기 위해 쉼을 선택했다. 트레킹에 모든 체력을 쏟았으니, 이제 달콤한 잠에 빠질 일만 남았다. 행복한 침대 위, 내일은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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