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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y 28. 2019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잘츠부르크의 마지막 밤, 웃으며 작별하는 방법

엄마에게 걸려온 전화에 잠에서 깼다. 오전 9시,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이렇게 또 하나의 교훈을 얻는다. 산에 갈 땐 스니커즈를 신지 말 것. 한참을 꿈틀대다 침대에서 겨우 일어났다. 오늘의 할 일은 밀린 빨래와 다음 여행지의 숙소 예약, 그리고 내 몸 상태 중간 점검.




어제의 사치를 생각하니 죄책감이 들었다. 기차 티켓과 곤돌라만 해도 예산 초과였으니. 결국 근처 마트에서 물과 요플레, 바나나 한송이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점심 메뉴는 호스텔에서 파는 라면. 봉지를 뜯어 면을 큰 그릇에 옮겨 담는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지만, 3분이 지나도 면은 분리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결국 미지근하고 싱거운 국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여행을 하는 동안 물은 아껴 마시고 밀가루는 안 먹겠다고 다짐했지만, 내가 세운 철칙은 너무도 쉽게 무너져버렸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들을 습관처럼 하고 있다니.






빨래를 방 안에 널어두려다 내일의 순조로운 여정을 위해 건조기로 향한다. 향이 좋은 섬유유연제는 세탁에 필요한 조건에서 밀려난지 오래. 장기 여행자는 깨끗하고 잘 마른 옷이면 충분하다. 밀린 숙제를 다 해치운 오후, 비록 계획했던 할슈타트는 가지 못 했으며 낮시간을 점심 식사와 빨래에 다 써버렸지만, 후회는 없었다. 인스브루크의 여운을 남기는 게 더 중요하다고 믿었기에. 어제의 고행길과 눈부신 설산이 오래 기억되길 바라며 침대에 눕는다.


오후 네 시, 새로운 룸메이트가 생겼다. 그녀는 피어싱이 귀 안으로 들어가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하소연하더니, 모로코에서 먹은 음식과 여행 중에 스쳐간 동행들, 수많은 시행착오와 좌절의 시간에 대해 늘어놓는다. 모로코에 가고 싶다고 외치자, 가연이는 이렇게 말했다. “모로코에 가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라면 밤을 새워서 말해줄 수 있어.”





우리는 늦은 오후에 산책을 나섰다. 걸음을 멈춘 곳은 미라벨 정원. “이렇게 예쁜 곳이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나왔을 텐데.”라고 말했지만, 정원을 다 돌아보지도 않고 약속 장소로 향한다.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네 사람은 저녁 식탁에 찬사를 보내며 만찬을 즐긴다. 훗날 잘츠부르크를 다시 찾는다면, 이 가게가 가장 먼저 떠오르겠지.

“너 3일째 한식 먹으면 질릴까 봐 말 안 꺼냈는데 니가 먼저 한식당 가자고 해서 진짜 놀랐어.”
“네? 저 한식당 완전 좋아하는데요? 이제 밀가루는 질려요.”



늦은 저녁, 강변을 따라 걷는다. ‘sprit of mozart’라는 문장 앞에 멈춰 나머지 글을 소리 내서 읽는 가연. “의자에 앉아서 눈을 감고 너 자신을 잃어 보래. 그리고 시간의 감각을 잊으래.” 어제와 같은 상황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오늘은 내가 미션을 수행하는 입장이라는 것. 그녀의 말대로 눈을 감고 온전한 고요를 느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수많은 감정이 번지면서 목이 메었다. 행복을 찾아 나선 길 위에서, 나는 자주 넘어지기도 했으며 무언가를 잃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여정의 끝에는 늘 감사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나 걸었고, 미소 지었다. 강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뜨거운 얼굴 위에 덮였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하고 다독이는 것만 같았다.






우리가 수많은 주제로 담소를 나누는 동안 해가 졌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처와 아픔을 겪었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포기해야 할 것과 절대 놓지 말아야 할 것, 또 더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을 마음에 새긴다. 달빛이 내린 강가 아래, 사랑스러운 도시에 감사를 전하며.






숙소로 돌아온 밤, 배낭을 정리하다 구석에 보이는 러시아의 흔적을 꺼냈다. 침대에 누워있는 친구들 머리맡에 셰메츠키를 한주먹씩 놓는다. 오빠는 벌떡 일어나 앉은자리에서 셰메츠키를 전부 입에 털어 넣고 가연이는 해맑은 표정으로 말한다. “잘 먹을게! 내일 버스 타러 가기 전에 깨워서 인사하고 가.” 알겠다고 대답은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그 새벽에 당신들을 깨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가 또 인연이 닿는다면, 그땐 셰메츠키를 까며 뜨거운 그린필드를 마시는 것도 좋겠어요. 모두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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