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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Jun 01. 2019

스위스에서 라면 먹는 게 어때서

꿈에 그리던 스위스에서, 나는 뭘 먹어도 행복할 줄 알았다.

버스 터미널로 가는 길. 헤매는 시간을 고려해서 일찍 나오면 뭐하나. 부지런히 움직여도 험난한 모험에 던져지는 건 매한가지. 구글 지도가 아닌 주변 사람의 말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탄다. 그리고 내가 도착한 곳이 기차역이라는 걸 깨닫는다. 조급한 마음을 안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을 때쯤, 어떤 장면이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간다. 느릿느릿 어딘가로 향하던 초록 버스. ‘일단 그 버스가 간 곳으로 가보자.’ 찰나의 기억 덕분에 가까스로 터미널에 도착한다. 출발 1분 전, 버스에 올라 안도했다.

갈색 티셔츠에 커피를 쏟았다. 커피 자국 위로 새벽빛이 번지고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 조각이 비쳤다. 빈 속에 커피를 마셔서인지 조금 어지러웠다. 안대를 쓰고 최선을 다해 평정심을 유지한다. 그렇게 큰 고비를 넘기고 도착한 뮌헨. 버스에서 만난 다니엘과 아침을 함께하기로 한다. 그는 내 티켓에 적힌 정류장 번호를 확인해주고 마트에서 산 소시지를 건넨다. 백팩을 항상 곁에 두고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조언과 함께. 소박한 아침을 먹으며 여행에 대한 생각을 나눈다. 그는 우리의 인연이 한국까지 이어지길 바란다며 웃는다. 이제는 각자의 길로 흩어질 시간. 다니엘은 내 짐을 버스에 실어준 뒤 이렇게 말한다. “Don’t be afraid, always smile. And enjoy your trip.”


루체른행 버스 안, 바나나와 크로와상을 먹으며 푸른 들판에 넋을 잃는다. 가연이의 피어싱은 무사한지, 연우는 다음 나라에 잘 도착했는지, 또 다니엘은 정말 한국으로 오게 될지, 작은 궁금증을 품으며 어떤 사실을 알아챈다. 나는 수많은 이에게 다른 방식의 사랑을 배우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것.





8시간 만에 도착한 취리히. 스위스 패스를 끊고 루체른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토록 오고 싶던 스위스에 닿았고 눈앞에는 그림 같은 풍경이 계속됐지만, 인상이 찌푸려졌다. 지독한 멀미가 이어졌으며 밀가루로 덮인 위가 반항을 시작했기 때문. 그렇게 녹초가 된 채로 루체른 역에 내렸다. 마트에 들어가 쇼핑을 하려고 보니, 화폐 단위가 달랐다. ‘아, 맞다. 환전한다는 걸 깜빡했네.’ 눈 앞에 놓인 라면 봉지를 보고 침을 삼키던 중, 실낱같은 희망이 생긴다. 잘츠부르크에서 연우가 준 6프랑. 타인의 호의는 누군가의 마음에 온기로 내린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놓고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그 고생을 하고 먹는 저녁이 라면이라니 허탈했지만 그런 걸 따질 겨를도 없었다. 하루 종일 먹은 게 크로와상과 바나나가 전부였으니. 라면을 입에 욱여넣고 배가 찬 느낌이 들자 살 것 같았다. 꿈에 그리던 스위스에서, 나는 뭘 먹어도 행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보니, 작은 불만이 생긴다. 이렇듯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이다. 비싼 스테이크나 파스타가 아니라 속상한 게 아니다. 식단의 불균형이 초래한 몸의 당연한 반응일 뿐.


내일부턴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감사한 마음으로 산길을 걸어야지. 반가워, 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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