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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Jun 25. 2019

파리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녀에게 웃으며 말했다. “merci!”

바젤 역 31번 플랫폼을 찾지 못한 길치는 기차를 놓쳤다. 다음 기차를 기다리면서 남은 프랑으로 쿠키를 산다. 이런 상황에서 음식을 찾을 줄이야. 역시 배고픔은 그 무엇보다 강력하다. 집 나온 지 36일째 되는 날. 앞뒤로 멘 배낭에 적응됐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어깨가 쓰리다는 걸 깨닫고 남은 파스를 꺼낸다. 기차에 짐을 싣고 자리에 앉자마자 걸려오는 당신의 전화. “뭐? 그래도 한 달 동안 기차 한 번 놓친 거면 양호하네.”





7시간 만에 파리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시선을 끈 건 지하철역 통로에 걸린 흑백 사진들. 화려하다고 소문난 모스크바 지하철역 보다 몇 배는 아름다웠다. 길을 헤맨 이유는 사진의 매력에 현혹되었기 때문일까? 하하하. 식물에 물을 주는 할머니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구글맵을 켠다. 거리를 걷는 동안 번지수나 대문 색깔을 확인한다. 진한 파란색 대문을 찾아오라는 임무를 받았기 때문에. 가까스로 도착한 숙소. 낯설지만 반가운 곳이다. 배정된 침대에 짐을 풀고 식탁 앞에 앉는다. 익은 쌀과 김치에 삼겹살이라니. 배낭을 메고 걸은 보람이 있다. 주인아주머니께 감사를 전한 뒤 밤 산책에 나선다. 저녁 8시, 도시를 구경 하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파리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시청사를 지나 센강 다리 위에 선다. 햇빛을 받은 강물이 반짝였다. 트럼펫 부는 할아버지와 금빛 세상. 소매치기와 밤길을 조심하라는 말에 잔뜩 겁먹는 것도 잠시, 와인잔을 들고 미소를 흘리는 사람들과 예쁜 그림에 매료된다. 알 수 없는 향기와 싱그러움에 혹해 낯선 도시와 사랑에 빠진다.







이번엔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동경하던 서점에 발을 들인다. 진열대를 가득 채운 책과 종이 냄새가 나는 곳. 나를 꿈꾸게 하는 새로운 공간에서 또 다른 삶을 그렸다. 미래의 서재에 놓을 책들을 머릿속에 입력하며 흐르는 음악에 눈을 감는다. 한참 후,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향한다. 이곳의 음악을 놓치면 후회할 것 같아서. 서점의 분위기가 짙게 밴 엽서 한 장을 들고 수줍게 곡 제목을 물었다. 그러자 책갈피 모서리에 가수 이름과 앨범을 적어주시는 직원. 그녀에게 웃으며 말했다. “merci.”







불 켜진 파리의 골목은 따뜻하다. 테라스를 가득 메운 음식과 케밥 가게 앞에서 저녁을 먹는 사람들, 지나가는 유람선에 손을 흔드는 여행자들, 화면 안에 손을 흔드는 유쾌한 파리 주민. 필름을 감고 또 감으며 셔터를 누른다. 쪼리를 신고 센강까지 와버렸다. 에펠탑까지 걸을까 하다 집에 돌아가기로 한다. 비록 기차를 놓치고 지하철역에서 헤매기도 했지만, 긴 여정의 끝은 늘 달다. 반가워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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