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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Jun 25. 2019

고요가 머무는 순간

어두운 하늘의 별들은 멀리서도 소중하게 빛나고 있었다.

기대하지 않은 도시에서 생각보다 많은 감흥을 얻었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 결국 파리에서 조금 더 머물기로 한다. 도심과 가까운 숙소로 이동하는 길. 이른 아침에 20킬로 배낭을 메고 한참을 걷다 보면 군인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게 된다. 나의 행군은 지금이다. 든든한 조식을 먹었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만, 힘든 건 변함없다.






짐을 풀고 숙소를 나선다. 활기가 넘치는 거리를 지나 시청사에 도착한다. 혼자 여행할 때 주어지는 특권을 누린다. 예를 들면 분수대 앞에 앉아 아이의 걸음마를 세거나 일기를 쓰는 일. 바람도 여유를 부리는 오후, 흘러간 시간을 헤아려 보다 글자 앞에서 주저했던 지난날이 스쳤다. 다이어리에 적힌 질문.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어렴풋이 답을 알 것 같았다. 행복을 찾는 것. 누군가의 도움에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일이나 계속해서 어떤 것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일 같은. 결국 나를 일으키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였다.





케밥을 먹고 싶었으나 케밥 가게를 찾지 못했다. 해서 케밥과 비슷한 타코를 먹기로 한다. 혼자 밥을 먹을 땐 음식에 집중한다. 맛을 느끼며 식사하는 건 꽤 중요한 일이다. 그릇이 비워질 때면 늘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음식은 한국이 제일이라는. 친절한 직원들에게 손을 흔들고 걸음을 옮긴다. 바이올린 연주가 울려 퍼지는 통로를 지나 목적지에 도착한다.






시선을 빼앗는 장면은 그림이 아닌 작품에 압도당한 사람들.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드는 예술은 아름답다. 하지만 개미떼 같은 인파에 그림을 볼 수 없을 때도 있다. 모나리자 그림은 먼발치에서 보고 지나쳐야 했으니. 전시관을 다 돌아본 뒤 2층으로 향했다. 미술관까지 이어지는 길치의 방황. 알지도 못하는 북유럽 작품을 보겠다고 얼마나 헤맸는지. 하지만 900번 전시관에 도착하자마자 평화를 얻는다. 천장 위를 덮은 그림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림들. 내가 마주한 북유럽의 회화는 세상의 수많은 감정들을 모아 놓은 이야기 같았다.




두 번째 목적지는 오르세 미술관. 넓은 루브르 박물관을 다 돌아보느라 발바닥이 아팠지만, 오르세를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그렇게 입장한 곳에서 또 다른 세상을 만난다. 넋을 잃고 고흐의 그림을 보던 중, 가이드의 설명이 귓가에 박힌다.  해가 뜨기 직전의 여명을 그린 ‘별이 빛나는 밤에’. 야경을 좋아하는 고흐는 밤의 빛을 표현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는 것. 이번엔 미션을 수행할 차례였다. 스위스에서 만난 오빠는 말했다. 작품에서 멀리 떨어져 반짝이는 별을 보라고. 어두운 하늘의 별들은 멀리서도 소중하게 빛나고 있었다.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기는 건 금방이지만, 잔잔함에 흠뻑 빠지는 건 큰 몰입이 필요한 일이다. 오르세 미술관이 마음 깊이 자리한 건 고요의 힘이 아닐까.







집으로 돌아온 밤. 저녁을 먹고 플릭스 버스를 예매하던 중, 2층 집 언니를 만난다. “맥주 한 잔 하실래요?” 고개를 끄덕이고 거실로 내려간다.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들이키며 과자를 뜯는다. 우리는 자기소개를 시작으로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녀는 냉동실에 넣어둔 아이스크림이 있다며 파티를 벌였다. 단란한 담소를 나누는 동안 깊은 밤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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