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막을 지나자 강원도가 시작된다. 곧 바다의 춤이 시작될 것이다.
유 월의 여행을 미루게 한 건 장마였다. 우리는 3일 내내 비가 쏟아질 거라는 강원도의 일기 예보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흐린 날에 별을 볼 수 있는 확률은 현저히 낮아지기 때문. 함께 떠날 두 여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몇 마디의 상의 끝에 결론을 짓는다. 만장일치로 일정을 변경. “안녕하세요. 28일에 예약한 게스트인데요, 혹시 다음 주 금요일에 가도 될까요?” 환불 정책이 유연한 숙소 사장님은 긍정의 반응을 보내셨다. 역시 인생에는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법. 이제 먹구름이 걷히길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수요일 오후. 시장에 들러 브로콜리를 산다. 위염 진단을 받고 강제 채식주의자가 된 나는 배가 고플 때마다 풀을 먹게 될 것이다. 하지만 브로콜리로 허기를 달랜다는 건 어쩐지 비현실적이다. 마트에 들러 천도복숭아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간다. 냉장고에 있는 블루베리와 오미자즙도 몇 개 챙겨야지, 생각하면서. 친구들이 과자를 먹을 때 브로콜리를 씹으며 슬픈 미소를 짓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원 없이 먹어둘 걸. 파스타도 과자도 초콜릿도 고기도. 채식을 시작한 지 고작 3일밖에 안 됐는데, 먹고 싶은 건 셀 수 없이 많다. 하하하. 그나저나 얼른 이 긴 밤이 지나가야 할 텐데.
디데이. 오전 여섯 시 알람에 겨우 몸을 일으킨다. 눈을 반쯤 뜬 채 머리를 묶는다. 도시락 재료를 꺼내 유부초밥을 만든다. 강원도로 가는 차 안에서 우리는 반드시 뭔가를 먹어야 될 테니. 안 봐도 비디오다. 그렇게 4인분 같은 3인분을 도시락 통에 담고 집을 나선다. 약속 장소에서 만난 우리가 차에 짐을 싣는 순간, 여행은 시작된다. 소소한 대화가 오가는 동안 한낮의 많은 부분이 흐른다. 우리가 차를 타게 된 계기는 이랬다. 대담하고 당찬 민지가 말했다. “그냥 내 차 타고 갈래?” 어차피 렌트할 거, 자차를 이용하자는 뜻. 무면허인 나는 반대할 권리도 없었고 가진이는 좋다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아니 나는 뚜벅이에서 잠시 탈출했다.
충청도와 경기도의 경계쯤, 음성 휴게소에 멈춘다. 집에서 챙겨 온 도시락으로 아침 식탁을 차린다. 스낵 코너에 있는 어묵 세 개와 함께. 강원도에 가는 게 처음이라는 민지는 설렘을 마구 표현했다. 벌써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유부초밥과 블루베리, 뜨거운 국물로 식사를 마친다. 아, 행복해. 물론 금방 배가 고파지겠지만.
문막을 지나자 강원도가 시작된다. 감미로운 영화 음악이 흐르는 차 안, 우리는 지난 연주를 회상하거나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고민하며 시간을 보낸다. 산 중턱에 세워진 양 조각을 지나 대관령 전망대에 도착한다. 뜨거운 햇볕 아래 미지근한 바람이 부는 곳. 하지만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는 청춘들은 박장대소하며 이 순간을 온몸으로 누린다.
오후 한 시의 양양 시장. 신선한 과일 가게와 떡집, 포장마차가 보인다. 감자떡을 사랑하는 서자매는 눈동자 회전이 빨라지고 신이 난 마틸다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시장 구경을 마친 후 익숙한 가게로 들어간다. 2년 전, 이곳에서 먹었던 감자 옹심이를 떠올리며. 오늘은 오징어순대와 옹심이 2인분. 감자는 위에 좋다고 했으니 마음껏 먹어야지. 이열치열이라고 했던가. 뜨거운 국물로 위를 편안하게 하고 즐거운 점심 식사를 이어간다.
햇볕에 달궈진 모래 위를 걷는다. 수평선과 하늘이 맞닿은 곳, 파도의 물결을 미처 헤아릴 수 없는, 함께 하는 누군가의 모습이 아름다운 곳에서. 한낮의 해변은 어수선하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든지 취할 수 있다. 형언할 수 없는 빛깔에, 많은 이의 행복한 장면에. 웃음소리는 바다를 덮고 하루의 순간들을 안온하게 한다.
엄마와 딸, 돗자리를 펴고 잔잔한 오후를 누리는 모습이 보인다. 그 순간 떠오르는 건 멀리 있는 가족들. 그와 동시에 영화의 한 장면이 겹친다. 한 지붕 아래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 서로 다른 마음을 안은 채, 처마 밑에서 폭죽 소리를 듣고 바다에 나가 물놀이를 하기도 했던 어느 가족.
휴휴암. 바다와 사찰이 있는 곳. 소나무와 기와, 그리고 불상은 어딘가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투명한 물속을 궁금해하며 계단을 내려간다. 더위를 식혀주는 바람 덕분에 뜨거운 날씨와 맞설 필요가 없게 된다. 우리가 물고기 떼를 구경하는 동안 누군가는 바위에 서서 기도한다. 그 간절한 마음이 흩어지지 않기를.
계획에 없던 장소에 멈춘다. 이번엔 주문진. 등대가 보이는 곳으로 걷자 사람들이 보인다. 행복한 순간을 담기 위해 파도 가까이에 선다. 엄청난 바람에 고개를 돌리고 말았지만. 건너편 길가에서 번지는 맛있는 냄새에 고민하다 시장으로 걸음을 옮긴다.
대게와 물회, 그리고 회덮밥을 주문한다. 두 여자는 게 다리를 똑똑 부러뜨려서 입 안으로 마구 넣지만, 역시 딱딱한 껍질을 분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결국 강제 채식주의자가 된 나는 채소와 샐러드를 독점한다. 지금은 먹고자 하는 욕구보다 위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더 크기 때문에. 빈에게 걸려온 전화에 대게 다리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는 말한다. “발라 줘야 되는 거지. 우리 공주님?”
오후의 긴 부분이 지나자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일몰의 시작, 천도복숭아를 손에 든 채 해가 지는 곳으로 달려간다. 오롯이 평온을 붙잡기 위해서. 모래 위에 글자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파도가 흔적을 지우려고 달려들면 소리를 지르거나 울상을 짓기도 하고. 나는 해질 무렵의 바다를 사랑한다. 선선한 바람과 느긋한 풍경들, 그리고 고요히 새겨지는 어떤 마음 또한. 오늘은 이 저녁의 미소를 간직해야지. 선선한 공기와 바다의 춤을 기억해야지. 마중 나온 강아지들을, 옥수수밭과 얇은 초승달을 잊지 말아야지.
별을 보러 갈 때 입으려던 패딩을 꺼냈다. 강원도의 여름밤은 정말이지 강력하다. 매트 위에 앉아 다리를 펴고 스트레칭을 한다. 하루의 피로를, 몸의 긴장을 푸는 시간.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이 차분해지자 온기가 돈다. 열 두시, 긴 하루의 막을 내리고 잠자리에 든다. 오늘도 이상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