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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Jul 18. 2019

부여 기행

고요함의 힘을 빌려 지도를 천천히 채색하는 일.

복숭아를 깎는다. 입맛을 다시며 아침을 연다. 오늘의 행선지는 부여. 다시 뚜벅이가 된 여행자는 가방을 가볍게 한다. 최소한의 것들만 담아 집을 나선다. 더위에 지치지 않기 위한 방법이다. 나긋한 바람이 불자 몸의 긴장은 어딘가로 사라진다. 뜨거운 시간이 오면 아침의 자유는 금세 잊힐 테지만. 여름 바람은 나에게 꽤 많은 힘을 준다. 오전 열 시의 터미널. 예은이를 만난다. 부여행 버스는 별로 없는 편이라 공주를 경유하기로 한다.






버스를 타려고 길을 여쭙자,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젊은 사람들이 왜 버스를 타. 걸으면 금방 가.” 날이 덥지 않아서 걷기로 한다. 햇빛이 드문드문 비치고 하늘은 맑은데, 뜨겁지 않았다. 부소산성에 다른 계절이 내린 것만 같았다. 숲에는 열기가 없었다. 잠시 여름이 비껴갔거나, 지구가 뒤집힌 건 아닐까, 의문이 들 정도로. 산뜻한 기운을 안고 산책을 시작한다. “우린 오르막을 걷고 있는데, 왜 하나도 안 힘든 거지?” 언덕을 넘으며 감탄을 멈추지 않는다. 예은이의 수줍은 외침에 고개를 돌리자, 돌바닥 위에 사랑스러운 흔적이 보인다. 엄마를 따라 산에 오른 아이가 두고 간 마음은 아닐까.

사자루를 지나 지도의 마지막 지점에 도착한다. 작고 한산한 선착장, 새파란 갑판이 시선을 끈다. 그 너머에는 또 다른 마을과 평화가 있다. 엔진 소리가 크게 울리는 자리에 앉아 멀어져 가는 풍경을 담는다. 머지않아 비가 쏟아지겠지. 사람들은 분주해지거나 더 느긋해질 것이며 식물의 향은 짙게 번질 테다. 그런 장면을 상상하는 동안 배는 행선지에 닿는다. 폭풍전야, 내일이면 바닥이 식으려나?



세 시의 궁남지. 커다란 연잎이 가득한 정원에 도착한다. 주황빛이 도는 꽃의 정체를 궁금해하며 네이버의 힘을 빌린다. 원추리. 이것 만큼 연잎과 잘 어울리는 꽃이 또 있을까? 연못에 화사함을 불어넣은 누군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우리의 감탄 또한 계속 되었다. “동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에요.” 눈빛을 반짝이며 환하게 웃는 예은. 아마 피로가 쌓이지 않았던 건, 그녀의 미소 덕분인지도 모른다.

오래 전, 연못 위에 배를 띄우고 작은 항해를 즐겼을 이들을 떠올린다. “그땐 별도 엄청 많았을 텐데, 진짜 행복했겠지?” 상상만으로도 밤의 낭만을 느낄 수 있는 곳. 물가에 비친 하늘은 물결에 떠밀려 내려가고 여행자들은 다리 위로 모여든다. 꽤 충분한 여유를 누린 우리는 말한다. 사랑스러운 곳을 떠나는 건 아쉽지만 모든 시간이 소중했기에 행복하게 돌아갈 수 있다고.

안녕, 부여. 다른 계절에 다시 찾아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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