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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Jul 27. 2019

어쩌면 장마를 사랑할 수도 있겠어

버스가 멈추는 순간 여름의 재회가 시작된다.

손발이 시리도록 추웠던 작년 겨울, 꽃이 지던 마지막 봄, 그리고 장마와 함께 시작된 여름. 어쩌다 보니 우리는 매번 다른 온도를 맞는다. 해서 나는 늘 변하는 계절을 손꼽아 기다린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차창 밖 풍경이 좋다. 비를 맞아도 함께일 수 있다는 사실에. 도착을 알리는 연락을 받고 덤덤했던 마음이 마구 요동친다. 버스가 멈추는 순간 여름의 재회가 시작된다. 군복을 입은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와 나를 와락 안는다. 새까맣게 탄 그의 얼굴이 훈련의 흔적을 증명해 준다. 빗속 아래 하나가 된 두 사람은 물 웅덩이를 밟고 웃음을 터뜨린다.







호우주의보 문자를 무시하고 목적지로 향한다. 오늘의 영화는 ‘미드나잇 선’. 색소성 건피증이라는 희귀병으로 빛을 볼  수 없는 케이티. 햇빛이 몸에 닿는 시간을 사랑하는 내게 그녀의 병은 끔찍한 고통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아픈 케이티가 찰리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들이 남긴 한 여름의 장면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누구보다 그녀를 아끼는 아빠와 모건, 그리고 찰리를 보며 사랑을 배운다. 영화가 막을 내리고, 누군가의 대사가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별빛 아래에서 노래를 부르고, 이 최고의 밤을 이어가는 건 어때?


영화관에서 나와 고즈넉한 한옥 길을 걷는다. 담쟁이덩굴과 낮은 옥상 위의 빨래집게, 바닥에 떨어진 꽃잎들을 보면서. 비가 그치자 잿빛 하늘에 예쁜 색이 피어난다. 골목은 한산했다. 고요한 전주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장마가 반가울 정도로. 옆에 있는 그에게 눈빛으로 속삭인다. 이제 당신을 만나 최고의 여름날을 보낼 수 있게 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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