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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Jul 28. 2019

벌써 네 번째 계절

체코에서 산 엽서와 니트가 담긴 쇼핑백을 건넨다.

일과 일 사이에서 벌어진 많은 사건에 치인 날들. 도망치듯 도안 섬을 벗어난다. 그 길의 끝에서 우산을 들고 서 있는 당신을 만난다. 온갖 투정을 다 부려도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는 빈. 마음 가득 평화가 깃든다. 선로 옆에서 김밥을 먹고 덜컹거리는 기차 소음에 섞여 여행을 시작한다. 비가 그친 울산, 조약돌과 해초는 파도에 쓸려갔다 다시 밀려 들어오면서 제자리를 지킨다. 어쩐지 바다에 온 우리를 반기는 것처럼 보였다.


모래사장을 벗어나 반짝이는 도시를 누린다. 발길이 멈춘 곳은 게임장. 가장 잘하는 게임을 꼽으라면, 나는 농구를 택할 것이다. 큰 점수 차이로 승자가 되어 환호성을 내질렀던 봄, 당신은 그때의 기억을 운운하며 승부를 건다.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도전장을 던진 그는 꽤 높은 점수를 낸다. 수영 후유증으로 어깨가 아팠지만 있는 힘껏 공을 던진다. 첫 번째 스테이지를 무사히 통과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공을 잡는 속도가 느려진다. 게임이 끝나고 미소를 지은 사람은 빈. 패자는 입을 꾹 다문 채 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이 바뀐다. 배가 고파졌기 때문. 결국 떡볶이와 라면으로 달콤한 밤을 보낸다.




한낮의 해변에는 낚시를 즐기는 아저씨와 두꺼비집을 짓는 아이들, 사랑스러운 엄마와 아들이 있다. 바람이 가져온 폭풍 같은 파도에 얼굴이 젖는다. 어깨에 묶은 갈색 천을 바닥에 깔고 배낭을 내려놓는다. 바다에 오기 전부터 계획한 모래성을 쌓기로 한다. 성이 지어지는 동안, 그는 조약돌을 모은다. 얼마 후, 파란 슬리퍼를 신은 군인의 공격에 모래성이 무너진다.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를 지르자 말도 안 되는 대답이 돌아온다. 남자들은 좋아하는 여자를 괴롭히는 게 취미라는. 하하.

바닷길을 따라 걷자 숲에 닿는다. 줄지어 계단을 오르는 많은 여행객이 보인다. 그 옆으로 겁 없는 고양이들의 행진이 이어진다. 거센 파도가 두려움을 만드는 대왕암 공원, 잠시 머뭇거리다 걸음을 내딛는다. 그토록 동경하던 도시는 내게 행복을 안겨준다. 구름 속에 속에 잠긴 울산을 떠나는 저녁, 거대한 피로가 쏟아져 잠에 빠진다. 열 세 정거장을 지난 버스는 울산역에 멈춘다. 집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또 다른 계절을 준비하게 되겠지.


“니가 나 말고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못 만나지. 이미 너한테 물들었는데. 검은색으로 뒤덮인 도화지에 무지개색을 칠하면 그게 보일까?”
“왜 내가 검은색이야?”
“넌 도화지야. 검은색은 나고.”


그가 남해로 돌아갈 때면 목이 메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꺼낼 수 없게 된다. 체코에서 산 엽서와 니트가 담긴 쇼핑백을 건넨다. 크리스마스를 닮은 니트, 조금 이르긴 하지만 상관없다. 다음 만남은 겨울이 될 테니. 강가를 따라 산책을 나선다. 익숙한 길에 서자 지난겨울과 봄과 여름의 흔적들이 쏟아진다. 행복은 아마도 이런 거겠지. 사랑하는 이와 몇 번의 계절을 함께 보내는 것, 그 위에 뜨거운 언어를 녹이는 것, 상대의 미소를 기억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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