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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Aug 02. 2019

우리의 정원을 만든다는 것

경주의 장미 조팝과 겹벚꽃 나무, 배롱나무를 떠올리며

그는 등산스틱을 들고 나타나서 멋쩍게 웃었다. 여자 친구 생일 선물로 산행 용품을 사주는 남자라, 꽤 신선하고 멋지다. 한 달 만에 보는 당신이 어딘가 낯설었다.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며 묻는다. “뭐가 달라진 거지?” 아마 더 멋있어진 걸 거라고 대답하는 빈. 하하하. 그렇다고 치자. 적당히 바람이 불고 햇살 좋은 수요일. 여행 가기 좋은 날이다. 티켓을 예매한 뒤 플랫폼을 찾는다. 꽤 여유로웠던 우리에게 닥친 위기 하나. 플랫폼을 잘못 찾았다는 것. 백팩을 멘 두 사람은 12번 게이트를 향해 뛴다. 출발 1분 전, 탑승 성공.

“과자 먹을래? 아니면 음료수?”
“너 뭐.. 매점이야?”


오후 두 시, 차창 너머로 스치는 모든 풍경이 아름다운 봄. 경주행 기차에 올라 배낭 두 개를 짐칸에 싣는다.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가 소음을 내면서 출발을 알린다. 그는 과자를 입에 넣어주면서 편지를 건넨다. 나무색 봉투를 열어 당신의 소중한 마음을 읽다 울음이 터진다. 그는 늘 그래 왔듯 화장실로 향하고, 나는 그가 건네는 휴지를 받아 든다. 마음을 추스르고 평온을 되찾는다.





Day 1, 첨성대와 안압지

3년 만에 찾은 신경주역. 기차가 향하는 방향 너머로 푸른 산이 보이고, 맑은 공기가 마음을 안온하게 덥힌다. 멀어지는 기차를 보며 대자연과 사랑하는 도시에 감사를 보낸다. 여전히 사랑스러운 경주. 소나무가 우거진 언덕에서 내려와 첨성대를 찾는다. 몇 해 전, 오래된 나무에 반해 안압지에 가길 포기했던 여름이 떠오른다. 그때의 기억을 꺼내며 속닥거리던 중,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뒷모습부터 너인 것 같더라.”

반가운 친구를 만나 황리단길의 파스타 가게로 향한다. 테이블에 마주 앉아 서로를 탐색한다. 두 커플이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이어간다. 맛있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는 근처 카페에서 티타임을 갖기로 한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저녁. 코코넛 라테를 마시며 대화를 이어간다. 누군가의 부재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수다에 몰입해있던 내 앞에 깜짝 선물이 도착한다. 전화를 받고 나간 빈이 들고 온 하얀 상자. “아, 케이크 사러 갔다가 길 잃을 뻔했네.” 덕분에 사랑채의 밤이 화려하고 따스하게 남는다.

동궁과 월지, 또는 안압지로 불리는 곳. 안쪽으로 들어가자마자 일렬로 서 있는 학생들이 보인다. ‘우리는 지금 지루한 수학여행 중’ 표정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속마음. 하지만 친구들과 시시콜콜 떠들며 까르르 웃는 모습은 봄처럼 화사하기만 하다. 호수에 비치는 따뜻한 불빛과 나무들, 빛나는 풍선을 들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 안압지와 잘 어울리는 보름달. 출구로 나와 경주의 밤길을 걷는다. 연못 너머로 기차가 지나가고 우리는 꿈만 같았던 오늘을 깊이 향유한다.







Day 2, 대릉원과 불국사

다음날 아침. 햇살이 좋아 캠핑 의자에 등을 바짝 붙이고 앉는다. 고스란히 내린 평온 한 조각과 여전히 여유를 사랑하는 우리. 그가 강아지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마당에 핀 자연을 본다. 내 정원에는 무얼 심을지, 식물들을 잘 키우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그러다 입을 연다. “식목일엔 나무를 심자. 마당에 정원을 만들 거야. 일단 장미 조팝, 수선화, 페퍼민트, 겹벚꽃 나무, 체리 나무. 으음 그리고 캠핑 의자랑 해먹, 빈백이 필요해. 또 뭐가 있었더라. 옆집에서 파는 레이스 조명과 레몬 라벤더 캔들?”

​초록이 된 벚나무길을 걷는다. 어제는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것들이 경주의 한낮을 밝힌다.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라일락 나무. 봄이 되면 보라색 꽃 아래서 따스한 날들의 향기를 기억하게 해 준 엄마가 떠올랐다. 사소한 추억이 계절에 깃들어있다는 것, 감사한 일이다. 밀면을 먹고 대릉원으로 향한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초록빛과 나무 냄새가 훅 끼친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소나무와 정원 안을 산책하는 여행객들이 보인다. 대나무 숲을 지나자 모여 있는 몇 그루의 배롱나무가 우리를 반긴다. 경주는 벌써 여름 준비를 하는 건지, 햇살이 뜨겁다. 분명 우리의 계절은 봄이었는데. 덥다는 말만 연신 내뱉으며 대릉원 산책을 이어간다. 오래된 나무와 잔디밭을 지나자 예쁜 돌담길이 보인다. 꽃이 핀 여름의 경주는 어떤 모습일까. 그땐 벚꽃이 아닌 배롱나무 꽃이 분홍빛으로 이 도시를 물들이겠지. 상상만 해도 미소가 번진다.

대릉원에서 나와 700번 버스에 오른다. 보문호를 지나고 경사진 오르막길을 넘어서 도착한 불국사. 나무 아래 개미떼 같은 사람들이 평일의 안도를 산산조각 낸다. 하지만 폭포처럼 쏟아지는 벚꽃 정원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젊은 청춘들은 피크닉 세트를 빌려 나무 아래서 시간을 보내고, 어떤 가족들은 반려견과, 아이들과 함께 만찬을 즐긴다. 아쉬움을 남겼던 작년 봄을 만회해주는 벚나무 아래 선다. 우리는 백팩을 메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행복했다. 봄을 함께 보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

​아마도 우리가 보내는 시간의 8할을 차지하는 건 산책 이리라. 계림과 안압지, 대릉원, 수목원, 그리고 집 앞. 그런 기억을 사랑하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걸음이 더해지는 동안 오가는 소소한 대화와 웃음소리, 몸에 닿는 바람 또한. 이렇듯 그와 함께한 날들은 늘 마음 한편을 은은하게 빛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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