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와. ‘사랑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유일한 것.’”
남해와 대전 사이, 어떤 말로도 설명될 수 없는 지난 시간을 회상한다. 어느덧 여름, 긴 간극을 메운 건 계절이거나 애틋한 마음이겠지. 깊은 그리움은 머나먼 강가로 흘려보내고 우리의 재회를 손꼽아 기다린다. 마음이 맞닿는, 설렘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순간을. 언젠가 친구와 나눈 대화가 짧게 스친다. 그녀는 물었다. 사랑을 확신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냐고.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와. ‘사랑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유일한 것.’ 나는 강한빈을 만나고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어.”
손꼽아 기다린 금요일 열 한시. 유난히 길었던 공백 기간을 마무리 짓는다. 전날 쓴 엽서를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선다. 하늘이 맑고 햇빛도 강렬한데, 어쩐지 바람이 시원하다. “그, 왜. 너 체했을 때 멈췄던 벤치 있잖아. 기억나? 그쪽으로 와.” 정류장 이름이 아닌 과거의 암호로 길을 찾는다. 도안동의 어느 버스 정류장, 거북이 등 껍질 같은 가방을 멘 군인에게 달려가 안긴다. 더 늠름해진 미조의 분대장은 반가운 얼굴로 인사하더니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우리는 나무 그늘 아래 다시 하나가 된다.
마지막 휴가를 앞둔 군인의 가방은 온갖 추억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훈련소로 보낸 열한 장의 엽서와 인터넷 편지, 책 몇 권, 스티커 사진. 빼곡하게 적힌 글자를 보며 희미해진 필름을 되감는다. 제주에서 보낸 겨울, 수없이 울고 웃었던 몇 번의 계절, 목소리만 들어도 위로가 되었던, 서로의 하루가 간절했던 날들. “아,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안 나. 진짜 신기하네.” 그리고 이어지는 누군가의 편지. 또 하나의 마음에 울컥, 눈물을 쏟고 만다. -빈아 잘 지내니? 춥지는 않은지, 국가가 책임져 주는 군대에 갔는데도 아빠는 너의 안부가 궁금하구나- 흩어진 여러 조각은 책상 위를 차지한다. 그것으로 흘러간 시간을 실감한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집을 나선다. 발등이 까져 걸음이 느려진다. 그의 선택은 자전거. 안장에서 떨어질까 두렵기도 하지만, 바람이 몸에 닿는 순간 전율을 느낀다. 금세 도착한 학교 정문. 얼마 후, 예상치 못한 일을 만난다. -오늘 메뉴는 품절입니다- 초복을 맞아 삼계탕을 먹으려던 계획이 무산된다. 학교 식당이 방학 중에도 붐빌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결국 근처에 있는 국밥 집으로 걸음을 옮긴다. 무더위를 잊게 해주는 건 그의 존재로도 충분할 테니. 각자의 취향대로 음식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는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최근 개봉한 영화 목록. “이번에 나온 토이스토리 봤어? 나 예전에 토이스토리 2 진짜 많이 봤는데. 집에 비디오 있었거든.” 아, 맞다. 우리 비디오 세대였지. 공감대를 형성하는 추억의 물건은 한 시절을 회상하게 한다. 예를 들면 내가 사랑했던 패트와 매트, 그리고 아빠와 함께 갔던 비디오 가게 같은.
오후 세 시, 뜨거운 시간을 피해 집으로 도망친다. 피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냉장고를 확인하는 것. 나의 여름을 지켜주는 사랑스러운 과일을 꺼낸다. 그는 그릇에 담긴 복숭아가 사라지는 속도를 보며 깜짝 놀라지만, 나는 주저하지 않고 포크를 든다. 우리 집이 복숭아 농장을 했다면, 나무의 절반은 내 차지가 되었겠지. 그렇게 나른한 공기에 취해 고요를 누린다.
오늘의 미션은 홈파티 준비. 넓은 이마트를 헤집고 다니며 카트를 끈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해먹과 캠핑 용품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하지만 남자의 시선은 식재료가 적힌 핸드폰 화면. 작은 수첩과 시장바구니를 들고 눈빛을 반짝이던 엄마와 비슷한 모습이다. 다른 게 있다면 시식 코너를 지나치지 못한다는 점? 메인 요리에 쓸 재료를 전부 찾은 후, 긴 미로에서 탈출하기로 한다.
분주해진 우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역할을 분담한다. 물론 칼을 잡는 사람은 빈. 나의 몫은 샐러드를 완성시키는 것. 귤과 유자청, 올리브 오일로 만드는 제주 샐러드를 포기하고 발사믹 소스를 든다. 오늘은 귤 대신 토마토. 먼저 채소를 씻고 잘게 찢는다. 양상추가 야금야금 입으로 넣기도 하면서. 그 위로 끓인 사과즙과 소스를 뿌리고 토마토와 파프리카를 곁들인다. 양 조절에 실패한 듯 하지만, 샐러드는 늘 옳다고 믿는다.
임무를 완수하고 강 셰프를 돕기로 한다. 그는 막막해하는 나에게 작은 숙제를 던져주고 능숙한 솜씨로 음식을 만든다. 감자와 양파 껍질을 들고 고민하던 중,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발끈한다. “시집가려면 한참 멀었는데?”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과연 나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엄마처럼 맛있는 식탁을 차릴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그러는 동안 메인 요리가 차례대로 완성되고 긴 나무 식탁 위로 만찬이 차려진다. 찹스테이크와 그라탕, 감바스, 그리고 토마토 샐러드.
저녁 7시 반, 초대받은 손님들이 모두 거실에 모인다. 감사 기도로 파티의 막을 연다. 먼저 그라탕을 맛보고 샐러드를 입에 넣는다. 그리고 나머지 음식을 천천히 음미한다. 2주간 끊었던 고기와 밀가루를 잔뜩 위에 채우는 시간. “으음, 이건 뭘로 만든 거야? 맛있네.” 요리할 때 문제가 된 소금이 골고루 녹아들었는지, 찬사가 계속된다. 강 셰프는 안도하며 웃는다. 집에 오는 길에 만난 택시 기사님의 말이 맞았다. 맛있는 음식은 시간이 필요한 법.
이어지는 티타임. 식탁 위로 달콤한 디저트가 차려진다. 오빠가 사 온 마들렌과 타르트, 초콜릿 케이크. 할머니를 제외한 모두가 포크를 든다. 식습관을 바꾸겠다는 다짐이 와르르 무너진다. 하지만 이내 행복한 기운을 얻는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건 삶의 큰 축복 이리라. 그릇을 정리한 후 두꺼운 앨범을 구경한다. 만년설과 오래된 기차, 교회 앞 정원에 놓인 토마토 나무는 머나먼 미국을 동경하게 한다. 낯선 세상은 누군가의 또 다른 꿈이 되기도 한다. 소소한 이야기와 부드러운 커피로 찬란한 밤을 장식한다. 소중한 오늘을 마음에 담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