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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Aug 07. 2019

여름의 민낯을 나누다

태안과 서산 사이의 장면, 우리가 기억하는 일에 대하여.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 쪼리와 카메라를 챙기는 순간 바다와 가까워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물을 사는 것. 뜨거운 여름날, 아스팔트의 열기에 서둘러 짐을 싣고 태안으로 향한다. 얇은 옷을 입은 앞 좌석 커플에게 묻는다. “과자 먹을래?” 쇼핑백에 든 녹차와 빼빼로를 건네는 빈. 운전하는 사람과 간식을 챙기는 사람은 늘 정해져 있다. 정든 공간을 벗어날 때는 왠지 모를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한다.





Day 1, 태안의 기록

오후 세 시, 태안에 닿는다. 언덕 위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빙수와 페퍼민트 차를 주문한다. 동남아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카페테라스. 태양 아래 더운 바람을 즐기는 이들이 여럿 보인다. 오두막 같은 나무집에 들어가 비밀스러운 공간을 즐긴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간 빙수가 다 녹아 없어지겠지. 결국 2층의 구석 자리에 모여 앉는다. 케이크 모양의 얼음 위에 연유와 우유를 붓는다. 위염 환자는 몸의 약속을 모른 척하고 달콤한 휴식을 마음껏 누리기로 한다. 그것도 잠시, 실내를 벗어나면 다시 더위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열기가 온몸에 퍼지고 말의 온도가 높아진다. 그때 오아시스 같은 친구가 말한다. “원래 청춘은 뜨거운 거야.” 그녀는 우리를 진정시킨다.

​꽃지 해수욕장, 해무에 가려진 바위를 보고 일정을 변경하기로 한다. 계획은 늘 변하기 마련. 아쉬움을 뒤로한 채 마트로 이동한다. 도시 사람들은 안주 거리를, 시골 사람들은 술을 고른다. 여행의 8할은 음식이 아닐까? 구불구불한 시골길 끝에서 만난 샛별길. 짐을 풀고 정원에 모인다. 몇 걸음만 가면 해변이 있지만, 수영장을 택한 우리. 튜브에 올라 탄 순간 전쟁이 시작된다. 네 사람 모두 물을 먹고 소리치지만 웃음소리는 끊이질 않는다. 여름을 사랑하는 이유가 또 하나 생긴다. 당신과 수영 시합을 할 수 있다는 것. “잘 봐, 시작한다!” 그에게 당당하게 외쳤지만, 얼마 가지 못해 멈추고 만다. 수경 없이 물속을 유영하는 일은 쉽지 않았으니. 결국 가장 자신 있는 배영으로 자존감을 회복한다. 바다에 가지 않은 건 현명한 선택이었으리라.


수영을 끝낸 후 바베큐장을 찾는다. 강 셰프가 비빔면 다섯 개를 끓이고, 나는 식탁을 책임진다. 한 명은 고기를 굽고 한 명은 먹을 준비를 하고. 그렇게 완성된 식탁 앞, 굶주린 하이에나들의 아우성은 고기로 진정된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맛있는 음식에 감탄하는 동안 어둠이 내린다. “일몰은 못 보겠지?” 오랫동안 동경했던 해변은 현실에서 멀어진다. 탄산이 담긴 종이컵은 금세 눅눅해지고 모기향이 엎어지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서로의 곁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으니. 잔을 부딪치며 태안의 저녁을 누린다.


여덟 시 반, 루미큐브를 위해 또다시 모인다. 찬 바닥에 둘러앉아 게임을 시작한다. 첫 판을 깔끔하게 끝낸 승자는 나. 그간 쌓인 패배의 서러움이 단번에 사라진 역사적인 날이다. 2차는 곱창 볶음과 과자 몇 개, 냉동실에 넣어둔 술로 이어진다. 나는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며 과자를 입에 털어 넣는다. 웃음을 터뜨리며 단란한 시간을 보낸다. 사소한 얘기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태안에서 보낸 아름다운 밤을 오래 기억하고 싶은 마음.




Day 2, 서산의 기록

새벽 다섯 시, 옆집에서 오는 전화에 눈을 뜬다. 로션도 바르지 않은 민낯으로 집 앞 해변에 가는 길. 해가 뜨고 지는 광경에 익숙한 그는 느릿느릿 움직이고, 일출이 오래간만인 나는 달뜬 표정으로 걷는다. 수국이 핀 정원을 지나 샛별 해변에 닿는다. 해무에 가려진 것들은 희미하지만 환상처럼 다가온다. 그 뒤로 이어지는 파도 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꼭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어느 숲길에 온 것 같아. 눈 좀 떠 봐. 정말 낭만적이지 않아?” 모래사장에 총총 박힌 조약돌과 소라게가 보인다. 앞서 가는 남자는 손에 쥔 키로 굴을 캐거나 어린 꽃게를 찾아다닌다. “어디까지 가! 나 해양생물 관찰하고 싶은데.” 그들의 실랑이 너머에는 갈매기의 발자국이 있고 끝없는 안개가 있다.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는다. 해변의 마지막 장면이라는 게 아쉬울 뿐.


한바탕 비가 쏟아졌다. 철석같이 믿었던 일기 예보에 먹구름이 그려져 있었다. 조금 우울했지만 배고픔을 달래는 게 우선이었다. 조식 시간이 되자마자 3층 카페로 올라간다. 토스트를 굽고 시리얼 한 컵을 마시며 빗소리를 듣는다. “괜찮아, 이따 그칠 거야.” 당신의 긍정적인 말에 위로를 받고 식사를 마친다. 변경된 일정은 점심을 먹으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


대야도 마을의 우동 가게. 낮은 의자에 앉아 몇 개 되지 않는 건반에 손을 올린다. 비 오는 날과 잘 어울리는 미스티. 연주를 마치고 수줍게 웃는다. 빗소리가 희미해질 때쯤, 식탁 위로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놓인다. 라면이 먹고 싶다던 남자는 매운 국물을 들이키며 조개를 까고, 배가 고팠던 이들의 얼굴엔 화색이 돈다.

​마을에서 나와 어제의 아쉬움을 달래기로 한다. 꽃지 해수욕장, 거짓말처럼 날이 맑아진다. 모두 웃음을 터뜨리며 모래사장을 거닌다. 갈매기들은 여행자들의 머리 위에서 사력을 다해 난다. 그 옆으로 바위와 연결된 나무다리가 보인다. 파도가 얕아지면 섬에 닿을 수 있을까? 물과 가까운 곳에 발을 딛자,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함께 달궈진 몸이 식는다. 그는 파도와 더 가까워지려는 나를 말린다. 해무로 보지 못했던 섬의 모습을, 꽤나 오랫동안 동경했던 낯선 바다의 풍경을 담는다. 바위에도 생명이 있다면 언젠가는 연리지처럼 하나가 되겠지.

​태안과 서산의 경계를 넘자 피로가 쏟아진다. 나른함에 취해 단잠에 빠진다. 얼마쯤 흘렀을까, 무릎에 내려앉은 뜨거운 태양에 눈을 뜬다. “뭔가 달달한 거 먹고 싶지 않아?”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피로의 원인은 루미큐브와 새벽 산책 이리라. 키가 큰 소나무 아래, 바다와 정자가 보인다. 기분 좋은 상상을 시작한다. 바위 옆에 나란히 누워 파도 소리를 듣는 일, 투명한 빛깔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 아무 생각 없이 고요를 누리는 일, 차가운 물에 닿는 일. 하지만 돗자리가 없는 네 사람은 아쉬움을 삼키고 바닷길을 따라 걷는다. 보랏빛이 반짝이는 나무를 알아내려고 렌즈를 가까이 대거나 달이 뜬 밤의 간월암을 궁금해하면서. 앞으로 돗자리를 챙깁시다, 우리.

​오후 세 시 반, 해가 뜨고 다시 더위가 시작된 시간. 해미읍성을 구경하기로 한다. 경주의 계림이 떠오르기도 하고, 남원 광한루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면서 강릉 선교장의 모습도 아른거리는 곳. 넓고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몇 개의 계단을 만난다. 도시 사람들은 단호하게 고개를 젓지만, 모험심이 강한 두 명은 언덕을 오르자고 보챈다. 100개쯤 되는 계단을 지나자 정상에 닿는다. 먼발치에 보이는 소나무의 행렬. 탄성을 내뱉으며 숲으로 달려간다. 평상 위에서 휴식하는 빈. 그를 보채다 혼자 산책에 나선다. “한빈이 열 많지?” 가진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야 깨닫는다. 당신이 여름을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어긋난 시간 위로 각자의 마음이 뒤엉킨다.

​카페에 들어가 더위를 달랜다. 한겨울에 쏟아지는 함박눈처럼, 감정의 소용돌이는 온 신경을 마구 자극한다. 페퍼민트 차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가 바람을 맞는다. 서운한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 로즈마리 앞에서 간신히 눈물을 참고 있는데, 그의 온기가 느껴진다. “이럴 땐 그냥 안아주라며.” 결국 또 울음을 터뜨린다. 내일이면 빈은 다시 남해로 돌아가고, 우리는 한 달을 떨어져 지내야 될 테다. 어수선한 마음이 정리되기도 전에 당신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자꾸만 눈물이 났다. 그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를 건네고 흔들리던 세상은 천천히 제자리를 찾는다. 다시 몸을 일으킨다.

얄개 분식,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본 낡고 허름한 가게에 들어간다. 모둠 떡볶이 2인분에 동의하지 못하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 “왜 넷이서 2인분인데, 그럼 밤에 배고파서 어떡해.” 그러자 세 사람 모두 입을 모아 말한다. “이거 저녁 아닌데? 밤에 또 먹어야지.” 음식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릇이 깨끗해진다. 그 위에 밥과 김가루를 섞고 수저를 든다. 눈물을 쏟은 자리에 달콤한 음식이 가득 채워지자 마음에 평화가 깃든다.

​마지막 목적지를 검색한 뒤, 내비게이션을 따라 한참을 헤맸지만 호수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근처 저수지에 멈춘다. 기대한 곳을 찾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 마음은 금세 옅어진다. 더 재미있는 무언가를 찾았기 때문. 누군가 물수제비 시합을 제안하자 모두 돌을 줍기 시작한다. 얼마 후 기쁨의 외침이 들린다. 환호의 의미는 납작한 돌을 발견했다는 것. 돌은 물 위에 흔적을 남기며 달린다. 밤하늘에 별이 총총 박힌 것처럼, 호수를 맑게 빛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기억은 늦은 새벽을 부른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랬다. 천장 조명에 밴드를 붙이며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뜬금없는 질문에 지난 여고시절을 떠올린다. 나름 모범생에 속했었다고 말하자, 근의 공식을 읊어보라는 빈. 잠시 뇌의 작동이 멈춘다. 그는 정적을 깨고 자랑스럽게 수학 공식을 읊는다. 그러다 애틋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때는 다시 고요를 찾는다. 나는 진지한 눈빛으로 사랑을 전한다. 당신과 함께 있을 때, 도로에 생긴 블루홀이 채워지는 기분이 든다고. 이성적인 당신은 작게 대답한다. “싱크홀이겠지. 근데 너 비유 진짜 못하는구나.” 아, 블루홀은 바다에 있는 거였지. 역시 로맨스보단 코미디에 가까운 우리. 남은 여름의 장면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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