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헐버트의 편지

작은 불편에도 감사하는 마음부터

by 앨리스킴


“사민필지(士民必知).”

남편이 느닷없이 내게 물었다.


한자로 풀이하면 ‘선비와 백성이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남편이 묻고 싶었던 건 아마 그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의아해하는 내게 남편은 뜻밖에도 호머 헐버트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사 책에 나오는 그 선교사 아냐?”


솔직히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미국에서 조선으로 파견된 선교사 한 명’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영상을 보다가 우연히 <사민필지>라는 책을 접했고,

그 계기로 헐버트에 대해 더 알아보게 되었다고 했다.


찾아보니 관련 영상도 꽤 많았다.

KBS 다큐, EBS 역사채널, 일상의 인문학…

다양한 곳에서 다뤄졌는데, 영상들을 보고 나니

정작 그동안 모르고 지나쳐 왔다는 사실에 조금 부끄러워졌다.




명문가 출신의 미국인이

어떻게 머나먼 조선 땅에 와 헌신할 수 있었을까?


호머 헐버트는 1886년 한국에 들어와 육영공원에서 근대식 교육을 시작했다.
그는 조선 청년들에게 새로운 학문을 가르쳤고, 《사민필지》를 집필해 백성들이 세상을 쉽게 이해하도록 도왔다.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 띄어쓰기를 처음 제안하며 우리말 발전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또한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며 “한글은 세계 어떤 문자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1905년, 그는 고종의 밀명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한국 독립을 호소했다.

영문 잡지 The Korea Review를 발간하며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소개하고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의 업적은 일일이 다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방대하다. 특히 한국 전통음악을 채보하고 《한국사》를 집필하며

한국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강조한 점이 눈에 띈다.


이미 100년 전, 헐버트는

한국의 아름다움과 고유한 언어를 높이 평가하며

미래 문화강국으로서의 잠재력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해방 후 초청을 받아 다시 한국 땅을 밟았지만,

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은 한국 땅에 묻히기를 소원한다”라고 말할 만큼 한국을 사랑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한국인이라면 호머 헐버트를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사진출처:네이버>



그의 수많은 업적 가운데

내 마음을 가장 오래 붙잡은 것은

다름 아닌 한 통의 편지였다.


1886년, 그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날

어머니께 보낸 그 편지에는 낯설고도 신비로운 서울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머니,

서울은 쾌적한 도시입니다.

제가 얼마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잘 지내고 있는지를 알면 안도하실 겁니다.


서울은 높이 치솟은 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원형극장 한가운데 놓여 있는 느낌입니다. …”





당시 조선은 미국과 비교하면

여러모로 불편하고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럼에도 그의 기록에는 단 한 줄의 불평도 없었다.

오히려 낯선 환경 속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을

따뜻한 시선으로 전했다.


그 시선은 단순한 풍경 묘사를 넘어,

다른 문화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간직해야 할 소중한 태도임을 일깨워 준다.




그 일화를 떠올리자

얼마 전 다녀온 말레이시아 여행이 생각났다.


현지에 도착했을 때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건 작은 불편함이었다.

길거리의 청결, 도로 사정, 교통 혼잡, 좁은 인도와 쉴 곳의 부족까지.

크게 불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레 마음속에 불만이 올라왔다.


‘낯선 곳이니 어쩔 수 없지’라며

스스로 달래 보았지만, 속마음 한켠에는

‘한국이 더 낫다’는 은근한 우월감이 자리했다.


그 불만을 딸에게 넌지시 털어놓았을 때,

딸은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낯선 데 가면 누구나 불편할 수 있어.

외국인들이 한국 와도 분명 불편하다고 느낄 거야.

그러니까 비교하지 말고 그냥 그 문화를 즐기면 되잖아.”


딸의 말은 지금도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작은 불만과 우월감이

얼마나 불필요했던 것인지, 지금 생각해 보니 민망하기까지 하다.




헐버트의 편지에는

낯선 환경을 마주하면서도 부정적인 시선을 거두고,

그곳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는 태도가 담겨 있었다.


그의 모습에서,

다른 문화를 존중하는 마음이야말로 결국

내 문화도 존중받는 길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느낀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문화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가 타인을 대하는 모든 태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게 된다.


이제는,

작은 불편에도 불평보다는

감사하는 마음부터 채워 보려 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