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소음과 마음

본다는 것, 만난다는 것

by 앨리스킴


새벽까지 영화를 보다 늦게 잠들었다.

암막커튼 덕분에 아침인지 점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시간의 감각은 천천히 꿈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에 잠이 깼다.

거실 스피커에서 기계음 특유의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추석 연휴 동안 가족과 친지 방문이 늘어나 층간소음이 발생할 수 있으니 입주민 여러분의 양해와 협조 부탁드립니다.”

아파트 관리실에서 내보내는 안내 방송이었다.


‘지금이 한밤중도 아닌데, 저런 멘트라니…’

명절 인사 대신 경고성 방송이 흘러나오니

추석 아침 공기가 왠지 싸늘해지는 기분이었다.


관리실에 누군가 민원이라도 넣었을까.


어쩌면 밤새 일하고 돌아와 잠든 사람일 수도 있고,

그저 조용한 아침을 바란 사람일 수도 있겠다.

누구에게나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겐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과 웃고 떠드는 하루일 테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조용히 쉬고 싶은 아침일지도 모른다.

누구의 입장이든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명절 아침도 조금은 따뜻해지지 않을까.


서로 다른 삶이 한 지붕 아래 맞닿아 있는 공간에서

완벽한 조용함도, 완벽한 이해도 바라기 어렵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하루의 소음이라면,

조금의 이해와 아량을 베푸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잠시 서로의 자리를 바꿔 서 본다면,

소리의 크기보다 마음의 온도가 먼저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러한 태도를 떠올리며,

문득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에 나오는 한 구절이 생각났다.

바로 *이양역지(以樣易地)* -


“상대의 모양(樣)을 바꾸어 그 자리에(地) 서 본다.”


이 말은 단순한 생각의 전환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는 과정을 뜻한다.


이양역지,

그 생각은 곧 오래전 다른 동네에서의 한 경험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 집 위층에 누군가 새로 이사를 왔었다.

늦은 밤까지 망치질과 드릴 소리가 이어졌다.

‘이사 온 첫날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이해했지만,

며칠 뒤부터는 밤마다 쿵쿵 울리는 앰프 소리가 심하게 거슬렸다.


결국 참다못해 인터폰으로 양해를 구했다.

잠시 후, 젊은 부부가 직접 우리 집으로 내려왔다.


“영화를 좋아해서 음향시설을 설치했는데,

바닥에 방음재를 깔아 괜찮을 줄 알았어요.”

“이렇게 울림이 큰 줄은 몰랐습니다.”

두 사람은 정중히 사과했다.


대화 도중, 남편이 상대의 익숙한 억양을 듣고 고향을 물었고,

곧 두 사람이 같은 고등학교 선후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방 고등학교 특유의 정이 피어오르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형님, 동생으로 부르며

가족끼리도 자연스레 오가게 되었다.


그 뒤로, 윗집에서 나는 소리가 전혀 다르게 들렸다.


장난감 자동차가 굴러가는 소리,

밤늦게 아이가 콩콩 뛰는 소리에도

우리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준호 녀석, 아직도 안 잤구나.”

“오늘은 일찍 깼네.”


그제야 알았다.

그게 바로 *‘본 것과 못 본 것의 차이’*라는 걸.


한 번 만나고 나면,

이해 못 할 일은 없다.




생각해 보면, 층간소음의 문제는 결국 ‘못 봄’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이웃.

서로를 ‘사람’이 아니라

‘소리의 근원’으로만 대할 때,

작은 발소리조차 커다란 분노로 들리게 된다.


소리의 문제는 어쩌면 관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보지 못함이 이해하지 못함으로 이어질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산다.

그러나 그 벽이 소리의 장벽이 아니라,

관계의 통로가 되기를 바란다.


관계가 생기는 순간,

그 벽은 분리선이 아니라 연결선이 된다.


신영복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본다는 것은 곧 만남이다.”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소음은 달리 들리고, 사람도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결국 세상을 조용하게 만드는 것은

방음재가 아니라, 마음의 거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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