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걷지 않는 도시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곳

by 앨리스킴


솔직히 말하면,

쿠알라룸푸르의 보도블록은 깔끔하지 않았다.

어디까지가 인도인지 애매한 구간도 많았다.


이 도시는 걷는 사람보다는

달리는 차를 먼저 생각한 도시처럼 보였다.


이 나라에서 걷는다는 건

이동이라기보다 선택에 가까웠다.

덥고 습한 날씨를 감안하면

그 선택은 꽤 적극적인 쪽에 가까웠다.




걷다 보면 가끔

뚜껑이 열린 채로 놓인 맨홀을 만난다.

경고 표지도, 안내문도 없다.


어떤 곳에는 철근 하나가 걸쳐 있고,

어떤 곳에는 나뭇가지를 십자로 얹어 두었을 뿐이다.


이 도시는 말 대신

‘이런 상황이니, 각자 알아서 조심하세요’라는 신호를

직접 건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걷다가 멈추고,

바닥을 한 번 더 보고,

앞사람의 발걸음을 따라 움직인다.


우리도 그렇게 걸었다.




횡단보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는 바로 코앞인데

건널목은 늘 멀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빠른 무단횡단을 택한다.


차가 쌩쌩 달리는 4차선 도로 앞,

누군가는 망설임 없이

일단 도로 쪽으로 발을 내딛는다.


‘나 지금 건널 거야.’ 
말보다 행동으로 먼저 보내는 신호다.


차가 줄어들 때까지,

속도를 조금 늦춰 주는 운전자가 나타날 때까지

느긋하게 서서 기다린다.


차가 많아도

이상하게 틈은 늘 생긴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러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그 사람 뒤로 붙는다.

어느새 그는

무단횡단의 인솔자가 되어있다.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고,

어디에 적혀 있는 것도 아닌데

그 패턴은 매번 비슷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먼저 눈치를 살핀다.

차를 보고, 옆 사람을 보고,

인솔자의 발끝을 보며 흐름을 따라간다.


어느새 우리도,

신호보다는 사람들을 먼저 보게 되고,

한 번, 두 번,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길을 건넜다.


처음엔 이래도 되나 싶어 어색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이곳의 방식처럼 느껴져 오히려 편해졌다.


규칙은 표지판에 있었고,

질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도심의 밤거리는

숲처럼 빽빽한 빌딩들이 뿜어내는 불빛과,

밤늦게까지 열어 둔 상점들도 많아

대체로 안전해 보였다.


괜히, 어깨에 힘을 주고

주변을 경계하며 걷지 않아도 될 만큼

위협적인 기척은 거의 없었다.



말레이시아는 국교가 이슬람이라

술이 엄격히 제한된다.

그만큼 술값도 비싸다.

그래선지

밤늦게 취객을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이곳의 밤은

소란스럽기보다 조용했고,

술에 취한 소음 대신

각자의 일상이 남아 있었다.


이 나라의 질서는 그렇게

한국과는 다른 방향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질서는

거리보다 실내에서 더 선명했다.


에어컨이 나오는 공간,

햇볕을 피해 이어지는 통로,

어디서든 연결되는 쇼핑몰의 내부 길.


이 도시에서는

바깥보다 안쪽이 더 크고,

더 활기찼다.


몰 안은 또 하나의 도시였다.

소비의 장소라기보다

생활의 광장에 가까웠다.


덥지 않고,

비 맞지 않고,

앉을 곳이 있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머무는 곳.


걷지 않는 도시라고 해서

사람들이 서로 멀리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가장 편한 방식으로

가장 오래 함께 머물고 있었다.


이 도시는

걷는 법이 아니라

머무는 방식으로 완성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