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시에서는 구걸하는 사람을 자주 본다.
신호등 앞, 역 입구, 몰 근처.
사람이 멈추거나 스쳐 갈 만한 자리에는
늘 누군가 작은 컵 하나를 앞에 두고 앉아 있다.
고개를 숙인 사람도 있고,
아무 생각 없는 얼굴로 앞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처음엔 그 풍경이 낯설었다.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몰랐고,
그냥 지나치자니
괜히 내가 너무 냉정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더 낯설었던 건 그 사람들보다,
그들을 대하는 주변의 태도였다.
사람들은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피하지도 않는다.
동전을 놓고 가는 사람도 있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지나가는 사람도 있다.
아무도 오래 바라보지 않고,
아무도 표정으로 과한 말을 걸지 않는다.
동정도, 경계도, 연민도, 짜증도 없이
그냥 같은 공간을 지나가는 사람처럼 스쳐 간다.
처음엔 그게 차갑다 못해 무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담담함 속에
묘한 편안함이 흐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어느 날, 구걸하던 여인과 아이가
길바닥에 앉아 노는 모습을 보았다.
종이 조각 같은 것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는데,
장난감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아이는 환하게 웃고 있었고,
여인의 눈길은 더없이 느긋했다.
그 장면이 유독 마음 한구석에 오래 남았다.
내가 아는 세계의 논리로는
그 상황과 표정이 쉽게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얼굴이 가능할까.’
그 질문은 곧 당혹감으로 변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들의 웃음은 조금 불편하기까지 했다.
내가 가진 상식 속에서
가난은 곧 불행이어야 했고,
구걸하는 사람의 얼굴은 비굴하거나 처연해야 했다.
‘어려우면 힘들어 보여야 한다’는 각본이
이미 내 안에 쓰여 있었던 것이다.
그때 알았다.
내가 사람을 ‘존재’가 아니라
‘상황’으로 먼저 읽고 있었다는 걸.
나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보기보다
‘가난’이라는 프레임에 가두어 보고 있었다.
그들이 지은 뜻밖의 미소는
내 편견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설명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내가 느낀 불편함의 실체는
그들의 불행이 아니라,
내 좁은 이해력을 비웃듯 피어난 그들의 평온함이었다.
이 도시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유난히 담담해 보였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여기서는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이
그 사람 전체를 대변하지 않는다.
가난은 그 사람의 삶을 구성하는
여러 조각 중 하나일 뿐,
그 사람을 부르는 이름표가 아니다.
배가 고픈 순간이 있어도
아이와 장난을 치며 웃는 순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경계를
존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멈추지 않지만 피하지 않고,
돕지만 유난스러운 시선을 보태지 않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향으로 흘러갈 뿐이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존중인지를
이 낯선 도시의 길 위에서 배운다.
그래서인지 이 도시에서는
시선을 너무 오래 붙잡지 않아도 되었다.
그 담담한 무심함이
오히려 서로의 존엄을 지켜주는
가장 따뜻한 방식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