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절 모르고 시주할 뻔한 이야기

by 앨리스킴


마지막 날이었다.

못내 아쉬워 우리가 자주 걸어 다니던 거리를 다시 걸었다.


늘 그렇듯 거리는 관광객과 현지인들로 붐볐고,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그날은 사람들의 표정까지도 조금 느리게 들어왔다.


KL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페트로나스 트윈타워 앞에서

우리는 기념 삼아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걸음으로

다시 길을 걷고 있었을 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우리를 불러 세웠다.


황토색 가사를 두르고 민머리를 한 모습.

순간 스님인가 싶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염주 같은 팔찌를 남편 손목에 걸어 주었다.

우리는 얼떨결에 그걸 받아 들고

서로를 한 번 바라봤다.


무슨 상황인지 묻기도 전에

이번에는 내 손목에도 같은 팔찌를 끼워주었다.


그리고는

절을 짓고 있는 듯한 건축물 사진을 보여 주며

작은 수첩을 내밀었다.

수첩 안에는 이름과 국적,

누군가의 흔적처럼 보이는 것들이 빼곡했다.


펜을 건네며 우리도 적으라는 시늉을 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뭔가에 홀린 듯 펜을 받아 들었다.


이름을 쓰려던 순간,

옆 칸에 적힌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상황이 정리됐다.


아, 이거였구나.

불사를 짓는 데 시주하면 복을 받는다는 거.

설명은 없었지만, 딱 감이 왔다.


“그래, 이것도 인연인데. 기념품 하나 샀다고 치자.”

남편은 그렇게 말하며 지갑을 꺼내려했다.


나는 수첩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봤다.

RM 500, RM 1000.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환율 계산이 돌아갔다.

20만 원을 훌쩍 넘는 금액이었다.


그 순간, 잠깐 집 나갔던 이성이 돌아왔다.


‘타국까지 와서 호구가 될 수는 없지.’


우리는 가진 돈이 없다고 말했다.

마지막 날이라

그만한 현찰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자 그의 태도가 갑자기 바빠졌다.

메모지에 RM 50이라고 적더니,

더 깎아주겠다며 길을 막아섰다.


우리 표정을 살피더니,

아까와는 다르게 손놀림이 빨라졌다.


이번에는 RM 20이라는 숫자를

낚서 하듯 휘리릭 적어 내려갔다.


그걸 보는 순간, 더 볼 것도 없었다.


우리는 팔찌를 억지로 돌려주고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어설픈 영어로 해명까지 해야 했던 게 황당해서,

우리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웃었다.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와, 진짜 바보 될 뻔했다’ 싶었다.


몇 시간 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또 그를 마주쳤다.

다른 관광객을 붙잡고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우리는 일부러 길을 크게 돌아갔다.




“나 아니었으면 당신 호구될 뻔했지? “

(지금도 종종 놀려 먹는다.)


“그래, 구해줘서 고마워.”


먼 타국에서 호구가 될 뻔한 하루.


지나고 나니

이 일도 결국 하나의 에피소드가 되었다.


사기 치는 사람도,

걸려들 뻔한 사람도 어디에나 있다는 걸,

그날 KL 한복판에서 아주 현실적으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