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끝에서, 나는 칼국수를 떠올렸다

만만하게 시작한 길이, 결국 나를 시험했다

by 앨리스킴


드라마 속 성곽길이 예뻐서 "우리도 가보자" 했던 약속은 금세 잊혔다.

먼 한라산은 작정하고 가면서도, 언제든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은 늘 뒷전이었다.

우리에게 한양도성이 딱 그런 곳이었다.



“내일 한양도성 투어 가자.”

느닷없는 남편의 제안에 별생각 없이 그러마 했다.

남편이 미리 점찍어둔 구간은 숭례문에서 시작해 창의문까지 이어지는 약 6km 남짓한 코스였다.

날씨도 웬만큼 풀렸고, 꽃길이나 걸어볼까 기대하며 지도를 보니, ‘이 정도쯤이야’ 싶었다.


숭례문에서 첫 스탬프를 찍을 때까지만 해도 호기로웠다.

괴나리봇짐 대신 배낭을 짊어지고, 옛 성문을 넘어서니 과거 보러 한양에 당도한 선비라도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기분도 잠시, 숭례문을 지나자마자 마주한 신호등 앞에서 꿈은 깨졌다.

숨바꼭질하다가 '못 찾겠다 꾀꼬리'라도 외친 것처럼, 빌딩 숲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거리가 꽉 찼다. 하필 점심시간이었다.


도심 한복판이라 성벽 흔적 찾기도 쉽지 않았다.

뻔히 아는 길이라고 자만하다 길을 놓칠뻔했는데, 발밑을 보니 '한양도성 가는 길'이라는 작은 표시가 도장처럼 찍혀 있었다.


정동길에 들어서니 구수한 멸치 육수 냄새가 코끝을 먼저 붙잡았다.

어디선가 막 끓고 있을 냄비가 떠올라 갑자기 시장기가 돌았다.

길게 줄지어 선 사람들을 보며 맛집인가 보다 싶었지만, 도저히 기다릴 엄두가 안 나 내려올 때를 기약하며 지나쳤다.

아침을 먹었으니 괜찮겠지 싶었던 그 순간의 선택이, 이날의 가장 큰 패착이었다.




인왕산 안내 쉼터까지는 그럭저럭 견딜 만한 산책길이었다.

하지만 종로문화체육센터를 지나면서부터 '걷기'가 아닌 '기어오르기'가 시작됐다.

바람 찰까 봐 입은 두꺼운 바지는 다리에 친친 감기고, 기모 맨투맨은 물먹은 솜처럼 어깨를 짓눌렀다.


올려다본 성곽 계단은 까마득했다.

고작 첫 코스 절반도 못 왔는데 벌써 ‘나 못 가!’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 했다.

믿었던 체력은 속절없이 바닥을 드러냈고, 다리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후들거렸다.

한양도성은 만만한 뒷산이 아니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길을 내어주는 거대한 성벽이었다.

덥고, 지치고,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아까 그 칼국수를 줄 서서라도 먹었어야 했는데...


“전에 가봤다며! 10분만 올라가면 된다며!”

괜히 남편에게 화살을 돌렸다.

남편은 자기가 왔던 코스는 여기가 아니었다며 그제야 실토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걷는 인왕산과 백악산 구간이 난이도 '최상'이란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정상은 찍고 봐야지.

’ 욕심부리지 말고 우리 속도대로 가자.' 스스로를 다독이며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쌕쌕거리는 내 앞을 외국인 청춘들이 펄펄 날아 지나갔다.

부러움을 뒤로하고 모퉁이를 돌자, 바위틈에 뿌리내린 분홍빛 진달래가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고. 나도 답했다. 이 척박한 바위틈에서 꽃 피우느라 참 대견하다고.


정상에 오르니 서울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흐린 날씨 탓에 연둣빛 수채화 대신 비둘기색 수묵화가 펼쳐졌지만,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하지만 남편의 무거운 수동카메라는 뿌연 안개 때문에 제 몸값도 못한 꼴이 되어버렸다.

아쉬운 대로 내 뒷모습에만 셔터를 누르는 남편을 보며 실감했다.

‘다음’은 늘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것을.


간식으로 챙겨 온 삶은 계란을 바위에 톡톡 쳤다.

퍽퍽할 줄 알았는데 커피와 함께 먹으니 치즈케이크처럼 부드러웠다.

산 정상의 공기가 마법이라도 부린 모양이다.


짧은 휴식을 뒤로하고 내리막 계단에 들어서니,

수백 년을 견딘 돌 하나하나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아뿔싸! 내려와서 보니 돈의문에서 스탬프 찍는 걸 깜빡했다.

다행히 인왕산 정상 인증샷은 챙겼으니 절반은 건진셈이다.

6km쯤은 거뜬할 줄 알았는데, "한 해가 다르다"는 어른들의 말이 뼈아프게 다가오는 하루였다.




사계절의 성곽을 다 품어야 비로소 금빛 마패를 손에 쥘 수 있다.

이걸 받는다고 해서 대단한 혜택이 있는 건 아니다.

어디 공짜로 들어갈 수도 없고 특별히 대접해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 묵직한 쇳덩이를 탐내는 건,

실질적인 이득보다는 '내가 해냈다'는 스스로에 대한 기특함 때문이다.

그것이 마패의 진짜 효능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양도성은

나처럼 체력 핑계로 흔들리는 이들을 위해 '마패'라는 솔깃한 당근을 준비해 뒀나 보다.


남편의 꼬드김에 또 못 이기는 척,

다음 계절의 성곽을 오르게 될지도 모르겠다.





***[알고 가면 좋은 한양도성 투어 정보]***


1. 구간별 거리 및 소요 시간 (평균치)

• 낙산: 2.1km (1시간, 난이도 하) - 입문자 추천

• 흥인지문·숭례문: 각 1.8km (1시간, 난이도 하) - 평지 위주

• 남산: 4.2km (3시간, 난이도 중) - 계단 많음

• 인왕산·백악: 각 4km 이상 (3시간 내외, 난이도 상) - 등산 숙련자 추천


2. 완주 배지 & 마패 받는 방법

• 완주 배지:

4대문(흥인지문, 숭례문, 창의문, 숙정문) 스탬프 + 지정 장소 인증샷(인왕산 정상, 청운대, 낙산 정상) 촬영 후 지정 수령처에서 확인.


• 사계절 마패(메달): 기간 상관없이 봄·여름·가을·겨울 4개 계절의 완주 배지를 모두 모으면 묵직한 금속 완주기념 메달(마패) 수여.



**작가의 팁! **

:“금강산도 식후경입니다.

특히 인왕산과 백악산 코스를 가실 분들은 꼭 든든한 식사(예: 칼국수)를 챙기세요.

공복의 계단은 생각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