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질없음’을 ‘속절없음’으로 읽었다

타인의 고통을 내 방식으로 해석하지 않기 위해

by 앨리스킴


브런치 작가 현루의 글 <무제>(3월 28일자)를

읽는 동안, 마음이 깊이 내려앉았다.


평소 그의 글을 접해왔기에

투병 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그날의 문장은 다른 결로 느껴져 오래도록 머물렀다.


나이가 드니 타인의 고통이 남 일 같지 않다.

예전 같으면 쉽게 지나쳤을 감정에도

자꾸만 마음이 머문다.


브런치에서 글로 만난 인연이었기에

현루 작가님의 상황은 유독 더 무겁게 다가왔다.

그 글을 읽으며 ‘속절없다’라는 단어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느낀 ‘속절없음’

제삼자의 자리에서 마주한 막막함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정작 그 중심에 선 작가는

스스로 ‘부질없다’라는 단어를 골랐다.


나는 왜 ‘속절없다’라고 읽었을까.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내 방식대로 단정 지은 결과였다.

생각해 보니, ‘속절없다’라는 단어 뒤에는 나의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


작가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요 며칠 자주 말했다. 부질없다고,
참으로 간결한 단어였다. 많은 것을 설명해 주면서도,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 자주 떠올랐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이렇게 자주 요동치는 것도,
어쩌면 아직 놓지 못한 무언가가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작가에게 ‘부질없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허무의 언어가 아니었다.

현실을 향한 정직한 직면이었고,

내면에서 겪어내는 마음의 요동이었다.


밖에서 바라본 나의 ‘속절없음’이 무력감과 절망에 가까웠다면,

그가 말한 '부질없음'은 삶에 훨씬 더 가까운 치열함이었다.


작가는 이어,

‘부질없음 속에서 하루를 살아내는 일이
가장 덜 부질없는 일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지기보다,

허무를 인정함으로써 오늘을 살아낼 작은 이유를 붙잡는다.


https://brunch.co.kr/@kimgeon/699


그의 글을 읽고 깨달았다.

누군가의 고통을

나의 언어로 섣불리 정의하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단어의 뜻은 사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하는 사람의 삶 속에 있다는 것도.


현루 작가가 스스로 길어 올린 ‘부질없음’의 무게를 보며,

타인의 고통 앞에 말을 아끼는 법을 다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