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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미 Nov 27. 2021

딸은 엄마 팔자 닮는다고요?

덕담 감사합니다.

'딸은 엄마 팔자를 닮는다.'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다른 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이 말은 희망 같다.

살면서 내가 하는 수많은 선택들이 결국 엄마의 팔자를 향해가는 거라면, 그보다 더 좋은 덕담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엄마의 생이 평생 고생 한 번 안 해본 부잣집 막내딸 같았던 건 전혀 아니었다.

남들에 비해 우여곡절이 많은 편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타고난 팔자가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편하기만 한 인생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가 엄마의 팔자를 부러워하는 건, 엄마 곁엔 언제나 변함없이 엄마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90세가 넘는 나이까지 살아계시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하루도 빠짐없이 최소 30분은 통화하고 지내며, 이따금 반찬과 과일을 보내주는 엄마의 세 언니들, 

그리고 어려서부터 든든했을 엄마의 세 오빠들이 여전히 엄마의 안부를 살핀다.


또 '아빠 같은 사람'이 이상형이라면 결혼을 할 수 없을 거라는 말을 듣고 자랐을 만큼,

완벽하게 가정적이고 대단한 사랑꾼인 우리 아빠가 남편으로 매일을 함께한다.

아빠는 항상 엄마의 기분을 살피고, 엄마의 취미와 꿈을 응원하며, 엄마의 시간을 엄마만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식사와 청소를 담당하신다. 

엄마만큼이나 요리를 잘하지는 못하시지만 한번 엄마가 해놓은 요리를 소분해 넣어두고, 다시 데우고 차리는 일은 늘 아빠가 대신하신다.

일평생 엄마가 뭘 해도 괜찮다고만 말하던 아빠가 최근에야 엄마에게 바라는 점이 생겼는데, 그건 바로 밥을 차려놓고 부르면 바로 나와달라는 것이었다. 

엄마는 아빠와 둘이 있을 때 특히나, 아이패드 드로잉을 하느라 "잠시만", "딱 1분만"을 반복하며, 차려놓은 밥을 식게 만든다며 아빠는 불만을 토로하셨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언제나 엄마 곁을 맴돌며(?) 두 사람은 거의 모든 순간을 공유하거나 함께한다.


93년생, 올해로 스물아홉인 아들은 엄마와 마트에 가는걸 제일 좋아하고, 함께 요리를 하자며 매일 같이 엄마를 귀찮게(?)하며, 

95년생인 나는 엄마를 떠올리면서 입꼬리를 올린 채 이런 글을 적고 있다.




그래서 나는 어려서부터, 아니 크면서는 더더욱 엄마 팔자를 닮고 싶었다.

애석하게도 지금까지의 나는 완전한 막내로 살아온 엄마보다는 맏이로 살아온 아빠와 더 닮아있지만, 

희망 같은 저 문장을 되뇌며 기대를 놓지 않고 있다.


간혹 농담처럼 엄마에게 나도 엄마처럼 철없이 살고 싶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근데 생각해보면 엄마는 일상에서는 아이디나 비밀번호가 생각 안 나면 혼자 분통을 터트리고, 

스마트폰 작동이 이상해지면 자주 화를 내는 등, 간장종지 같은 그릇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가도, 정말 커다란 일 앞에서는 의외로 이해의 깊이가 깊다.

아빠의 사업이 위태로웠을 때도, 그렇게 우리가 이사를 가야 했을 때도 엄마는 오히려 우직했다.

할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을 때도, 엄마가 넘어져 다리에 금이 갔을 때도 엄마는 단단했다.

20년 동안은 엄마가 결혼을 잘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조금 더 크고 보니 엄마라서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엄마에게 아빠가 필요한 것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아빠에게 엄마가 필요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이 글을 적으면서 언젠가 엄마가 읽게 되면 아주 우쭐해하겠구나 생각했는데 역시나.

작가의 서랍에 저장해둔 이 글을 읽어보고는 미소를 숨기지 못하며 빨리 올리라고 독촉을 한다.

예측 가능하고 투명한 게 정말 우리 엄마답다.


가끔이지만 엄마가 아주 크고 넓은 사람 같을 때가 있다. 그러다 이내 아주 사소한 일로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대는 것을 목격하면, 속에 있는 간장종지가 넘친 게 아니냐며 핀잔을 주긴 하지만 그런 모습의 엄마까지도, 아니 그런 모습의 엄마를 특히나 닮아가고 싶다.

나도 57세에 저토록 철없이 아주 자그마한 일에 분개하며 쏟을 에너지가 가득한 사람이면 좋겠다는 마음이랄까?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계속 믿고 또 바라볼 예정이다.

'딸은 엄마 팔자를 닮는다.'라는 말이 적어도 나에게는 유효하게 해 달라고, 사실이게 해 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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