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불러주니,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불러주니, 꽃이 되었다-
*산책길에서 만난 꽃들의 전설- 보랏빛에 스민 이야기들
어느새 6월,
계절이 붓을 들어 꽃잎에 색을 입힌 듯 산책길은 한 폭의 풍경화가 되었습니다.
익숙한 풀잎 사이로 어디선가 처음 보는 꽃들이 하나둘 피어납니다.
흰색, 노랑, 분홍, 빨강… 그리고 보라.
이름을 아는 꽃도 있지만 처음 마주하는 낯선 꽃들도 많습니다.
예전부터 그 자리에 피어 있었을 텐데
그저 관심 없이 스쳐 지나쳤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돼요.
요즘 우리 부부는 산책길에서 만난 꽃들을 하나하나 사진에 담고,
이름을 찾아보는 즐거움에 푹 빠져 있습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 이 떠오릅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 모든 존재는
이름을 가질 때 비로소 빛을 갖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곱게 피어 있어도 우리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그저 이름 모를 풀로 여겨지다 조용히 사그라들고 말겠지요.
하지만 이름을 알고 나면 어느새 특별한 인연처럼 느껴지고,
괜스레 마음이 가고 오래 바라봐 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오늘도 천천히 걸으며 이름을 묻고, 불러봅니다.
아이리스, 알리움, 수레국화, 수국, 작약, 수련…
그중에서도 오늘은 유난히 보랏빛 꽃들에 눈길이 갑니다.
눈부시게 화려하진 않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련하고 기품 있는 그 빛깔-
보랏빛 안에,
무언가 오래된 이야기가 조용히 숨어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알리움, 그 보랏빛 이름을 부르면
길가에서 문득,
마치 기품 있는 귀족처럼 우아하게 서 있는 보랏빛 꽃송이가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멀리서 보면 작고 둥근 공 모양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수많은 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듯한 모습이에요.
그 사이 남편이 빠르게 검색을 해봅니다.
이름은 알리움(Allium).
의외로 이 꽃은,
마늘, 파, 부추와 같은 뿌리를 지닌 식물이라고 해요.
중세 유럽에서는 병을 막고 악귀를 쫓는 신비로운 꽃으로 여겨
병자의 목에 알리움 구근을 걸어주는 풍습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잊을 수 없는 사람을 기리기 위해 무덤가에 심기도 했다고 하네요.
이별은 시대를 막론하고 늘 마음 한켠을 저리게 하는 일이었나 봅니다.
‘영원한 사랑’, ‘인내’, ‘슬픈 이별’이라는 꽃말처럼,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연인을 기다리며 알리움을 심었다는
애틋한 전설도 전해지는데요.
그래서인지 그 보랏빛 안에는 어디선가 오래도록 간직해 온 아련한 그리움이 스며 있는 듯합니다.
예전에는 무심히 스쳐 지나갔던 이름 모를 꽃이
이제는 그 이야기 하나로 기억 속에 잔잔한 의미로 남게 되었습니다.
*아이리스(Iris), 애잔한 전설
조금 더 걸음을 옮기다 또 하나의 보랏빛 꽃을 마주했습니다.
이름을 아는 스스로가 대견한 듯 남편의 목소리에 살짝 힘이 들어가 있어 보입니다.
남편이 가리킨 곳엔
잔잔한 바람에도 살랑살랑 고개를 흔드는 보랏빛 붓꽃, 아이리스가 피어 있었어요.
부드럽고 여린 꽃잎 속에 무언가 비밀이라도 감춰져 있는 듯, 겹겹이 말없이 서 있는 모습입니다.
그 비밀을 살짝 엿보고 싶은 마음에 아이리스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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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의 전령, 아이리스가 전하는 이야기
아이리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으로,
무지개를 타고 하늘과 땅, 신과 인간 사이를 오가던 전령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또 하나의 역할도 맡고 있었지요.
세상을 떠난 이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임무였습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장례식 때 아이리스 꽃을 시신과 함께 묻는 풍습이 있었답니다.
사랑하는 이가 외롭지 않게, 무지개의 전령이 되어
저 너머 세계까지 잘 배웅해 달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겠지요.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희망과 슬픔—
그 모든 것이 보랏빛 꽃잎 속에 조용히 스며 있는 것 같아
우연히 마주한 붓꽃이 더욱 애잔하게 다가왔습니다.
오늘도 함께 걷는 익숙한 길 위에서
새로운 꽃들을 만나고,
이름을 불러주며 인사를 나눕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우리에게도 천천히, 꽃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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