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로 살아가는 방식

-커피 볶는 남자-

by 앨리스킴


[우리의 속도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부부로 살아가는 방식>

-커피 볶는 남자-



저녁에 끓였던 된장찌개 냄새가 아직도 집안 구석구석에 배어 있을 무렵,

남편은 커피팬을 꺼내 들었습니다.


구수한 커피 볶는 냄새가 방마다 번지고,

마치 로스터리 카페 앞을 지날 때처럼 코 안 가득 향이 퍼집니다.


저는 소독이라도 하듯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집안 곳곳의 공기를 바꿉니다.


남편은 커피를 볶는 그 과정 자체를 즐깁니다

늘 정성껏 챙겨주는 처형들에게

직접 볶은 원두를 선물하는 게 큰 기쁨이죠.


“우리 정서방이 볶은 커피 맛이 최고야~!”

그 한마디에 남편은 으쓱-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오늘도 그렇게 커피 볶을 준비를 시작합니다.


그 남자는

생두를 꺼내 결점두를 골라냅니다.


마치 자신의 마음속 자잘한 시끄러움을 골라내듯,

천천히 정성을 쏟습니다.

그리고는 커피 오일로 반질반질 윤이 나 있는

묵직한 팬을 꺼내 가스불 위에 올립니다.


조금 지나자,

뿌연 연기가 자욱하게 주방을 넘어 거실까지 번집니다.


뜨거움을 견디지 못한 커피콩들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작은 폭죽처럼 터지기 시작합니다


한 손으로는 뚜껑을 눌러 잡고,

다른 손으로는 무거운 팬 손잡이를 흔들어 까붑니다.

그 바람에 팔에 힘줄이 울퉁불퉁 서고,

팬은 살랑살랑 흔들리며 커피콩을 볶아냅니다.


한참을 볶고, 뜸을 들이고,

그렇게 몇 차례를 반복한 뒤 팬을 내려놓고

익은 커피콩을 구멍 숭숭 뚫린 쇠바구니에 옮깁니다.

초콜릿 색이 입혀진 커피콩을 재빨리 들고나가,

찬바람에 식힙니다.


이렇게 식혀야 구수하고 향도 좋아.”

꼭 혼자만 아는 커피의 작은 비밀 레시피 라도 되는 듯 말합니다.


원래는 유리병에 담아 보관했는데,

어느 날 눅눅해진 커피를 아쉬워하던 남편이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커피 담는 작은 텀블러가 답이었어.

밀폐도 잘 되고, 숙성도 훨씬 잘 돼.”


정말 그랬어요.

텀블러 뚜껑을 열 때마다 나는 ‘퐁’ 소리,

그리고 함께 퍼지는 깊은 향은

마치 작은 마법 같았습니다.




금방 볶은 원두가 더 신선하고 맛도 좋을 것 같지?

그런데 아니야. 2~3일 정도 묵어야 깊은 맛이 나. “


기다림의 시간이 꼭 필요한 게 있는 것 같아.

사람도, 일도…

그러니까 아들을 믿고, 천천히 기다려주자.”


결국은 아들 이야기입니다.

요즘, 마음처럼 일이 풀리지 않는 아들을 보며

종일 걱정하는 저를 향해

남편이 건넨 나름의 위로였어요.


저도 잘 알아요.

걱정한다고 달라질 게 없다는 거,

부모는 그저 조용히 믿어주고,

필요할 땐 말없이 곁에 있어주면 된다는 걸요.


그런 제게 남편이 조용히 말을 덧붙입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 중에,

실제로 일어나는 건 몇 퍼센트나 될까?”


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이 걱정했던 일의 85%는 결국 일어나지 않았고,

설령 현실이 되더라도 그 대부분은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해결됐다고 해요.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도 이런 말을 했다고 하죠.

내 삶은 끔찍한 불행으로 가득했지만,

그중 대부분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참, 공감이 되는 말입니다.


그래요. 걱정해서 해결될 일이었다면,

누군들 하루 종일 걱정만 하고 살면 되겠지요.

생각으론 알면서도 잘 안 되는 게

이 요상한 마음이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마음이 복잡할 땐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며 저만의 방식으로 다스려봅니다.


정말 힘든 순간엔

그 말을 마음속으로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거든요.


저도 요즘은,

걱정보다는 믿음을 조금 더 자주 꺼내보려 합니다.


살아보니,

정말이지 지나가지 않는 일은 없더라고요.

시간이 흐르면,

어찌어찌 다 지나가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 사이, 연기는 창문 밖으로 빠져나가고,

커피 볶는 냄새도 천천히 사그라들고,

집 안 공기는 다시 고요한 평정을 되찾습니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남편은 얼마 전에 볶아둔 원두를 그라인더에 넣고 갈기 시작합니다.


음~ 향 정말 좋다! 가까이 오니까 더 짙네.”

커피 갈고 있는 사람만 누릴 수 있는 특혜지. 갈아볼래?”

남편이 그라인더 손잡이를 저에게 양보합니다.


“어디 커피야?”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산뜻한 꽃향기 같은 산미가 확 올라오네.

난 예가체프도 좋긴 한데,

지난번에 볶았던 과테말라 안티구아가 더 좋더라.

묵직하고 고소한 맛이 내 입에 더 잘 맞아.”


“안 그래도 이번엔 예가체프를 좀 세게 볶았어.

그러면 산미가 덜하고 구수한 맛이 더 살아나거든.”


평소에도 남편은

짙은 초콜릿 색이 도는 미디엄 다크 정도로 로스팅을 합니다.

우린 둘 다 커피 취향이 비슷해서

너무 가볍거나 신맛이 강한 커피보다는

구수하고 묵직한 맛을 더 좋아해요.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는

향긋한 꽃향기 같은 산미가 느껴지고,

과테말라 안티구아는

묵직하고 고소한 맛이 입안에 오래 남는 것 같아요.


커피 맛을 깊이 아는 건 아니지만,

마시다 보면 우리 입맛엔 이게 딱 좋더라고요



물을 끓이고, 천천히 원두를 내립니다.

거실엔 갓 구운 빵처럼 달콤하고 구수한 커피 향이 퍼지고,

그 향기만으로도 마음이 달래집니다.


휴대폰으로 <카페에서 듣기 좋은 음악>을 검색해

스피커에 연결하니, 잔잔한 팝송이 공간을 채웁니다.

따뜻한 커피잔을 마주 놓고,

그제야 마음의 무게도 조금 내려놓아집니다.


아들 걱정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던 하루였지만,

커피 향에 기대어 스스로를 다독여봅니다.


생두가 서서히 익어 원두가 되듯,

우리의 하루도 그렇게,

조금씩 깊어지고 있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