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부부로 살아가는 방식

-경포대에서 시작된 우리라는 이야기-

by 앨리스킴


[우리의 속도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부부로 살아가는 방식>

-경포대에서 시작된 우리라는 이야기-



엄마도 처음부터 ‘엄마’ 였던 건 아니니까요


처음 엄마가 되었을 때,

그 역할이 얼마나 벅찬 일인지 몰랐습니다.

모든 게 서툴고 낯설었죠


직장과 살림, 육아를 함께 한다는 건

숨 한번 고를 새 없이 달리는 장거리 경주 같았어요.


결국 저는 ‘친정엄마 찬스’를 쓰게 됐고,

지방에 계시던 엄마는 기꺼이 서울까지 올라오셨습니다.

살림이며 육아며 모두 엄마의 손에 맡기고,

그제야 잠깐 숨을 돌릴 수 있었죠.


그렇게 잠시나마 여유를 찾은 어느 날,

집으로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엄마는 소녀처럼 해맑은 얼굴로 기뻐하셨어요.


“야, 니가 진짜 국희 맞나? 이게 얼마만이고!”


국민학교 시절 친구라며,

거의 60년 만에 연락이 닿았다고 했어요.

전화를 끊고도 한참 동안 들뜬 기분이 가시지 않은 채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풀어놓던 엄마의 표정은

제가 알던 ‘엄마’가 아니라, 장난치고 웃고 수다 떨던 초등학생 아이 같았어요.


그 순간, 처음으로 깨달았죠.

아, 내 엄마도 누군가의 딸이었구나.

사춘기의 마음앓이를 지나고,

가슴 설레는 청춘을 건너

한때는 꿈 많던 소녀였겠구나’ 하고요.


그날 이후로,

엄마의 지나온 시간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막내로 태어난 제 눈에 비친 엄마는

늘 아버지의 아내였고, 언니 오빠들의 엄마였고,

집안일에 하루를 쏟아붓던,

동네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아주머니의 모습이었으니까요.


저는 처음부터 ‘엄마’를

그저 ‘엄마’로만 기억해 왔다는 걸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생각해 보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그렇지 않을까요?

태어났을 때 부터 이미 ‘엄마’라는 이름을 달고 계셨으니까요.

그 이전의 시간들-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딸이자, 속 깊은 친구였고,

한때 누군가의 연인이었을 엄마의 모습이

아이에겐, 미처 상상조차 되지 않는 세계였을지도 몰라요.



“엄마, 아빠는 어떻게 만났어?”


문득, 딸아이가 했던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엄마, 아빠는 어떻게 만났어?”


오래전에 한 번쯤 들려줬던 이야기일 텐데,

딸이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보고 싶어 졌습니다.


엄마 아빠도 한때는

가슴 뛰는 청춘의 한복판을 지나왔고,

그 시절을 건너,

지금의 우리로 함께 나이 들어왔다는 것.

이제 다 큰 우리 아이들도,

같은 청춘을 지나온 존재로서 조금은 더 공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어요.


이른 새벽, 밤 기차를 타고 강릉역에 도착한 우리는

역사를 빠져나와 설악산 하계 휴양지로 향하는 길에 올랐습니다.


직장 선배 언니, 동기, 그리고 나.

셋이 여름휴가를 뒤로 미루고 떠난 늦깎이 여행이었죠.

첫 일정은 경포대와 오죽헌을 둘러보는 것이었고요.


9월 중순, 한여름이 막 지난 강릉의 새벽공기는 제법 서늘했습니다.

안개가 희미하게 깔린 경포대에서 우리는

낯선 곳에 도착한 설렘으로 카메라부터 먼저 꺼내 들었죠.

그때 마침 지나가던 낯선 청년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학생! 사진 좀 찍어줄래요?”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빡빡머리에 무거운 가방을 멘 그를 보며,

“고3이죠? 밤샘 했나 봐요. 고생 많네요.

학력고사도 얼마 안 남았죠?”

당연하다는 듯, 내가 먼저 단정 짓고 말을 던졌어요.


“고3 아니고요, 제대한 지 보름 됐습니다.”

그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어요.


우린 믿기 어려워 농담 섞인 말로 민증을 까자며 통성명을 했고,

같은 지역 출신에 동갑이고,

학번도 같다는 걸 알고선 금세 말이 통했어요


그는 설악산으로 혼자 여행 중이라며

아무 계획 없이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걷고 있다고 했습니다


제대 후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 ‘무전여행’이었다고 했어요.

시골 마을을 지나올 땐, 일손을 거들고 숙식을 해결하기도 했고,

걷다가 지치면 차를 얻어 타며

이렇게 강릉까지 오게 됐다고 하더군요.


우리 셋은 주저 없이 제안했어요.

“목적지가 같으니 같이 가요! 어차피 우리도 짐이 많거든요.”

생각보다 흔쾌히,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시절은 지금보다 사람을 믿어도 되는 세상이었고

그의 인상도 어딘가 믿음직스러워 경계심이 들지 않더라고요.


사실 그보다도, 우리가 들고 있던 먹거리 박스의 무게가 정말 만만치 않았어요.

그땐 정보가 부족했던 때라, 숙소 주변 상황을 몰랐거든요.

그래서 4박 5일 치 식량을 바리바리 챙겨 갔었죠.

지금 생각해도 그때 참 순진했지 싶어 웃음이 납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때 남편은 우리 제안이 반가워서라기보다,

밥 먹을 타이밍을 놓쳐 너무 배가 고팠고,

딱히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고 하더군요.


돌이켜보면, 그 무거운 먹거리 박스가

우리를 이어준 의외의 ‘미끼’였던 셈이죠.


그렇게 우리는 넷이 되어 시외버스에 올랐습니다.

누구와 짝이 될지는 손바닥 뒤집기로 정하기로 했죠.

“하나, 둘, 셋!”

순간, 손바닥이 이리저리 뒤집히며 웃음이 터졌고-.

그 짧은 장난 끝에,

운명처럼 지금의 남편과 제가 한 짝이 되었습니다.


그땐 몰랐죠.

그 짝꿍이 지금까지도 쭉, 제 옆자리에 앉아 있을 줄은요.




설악산은 여러 번 가봤다며, 그는 가이드를 맡겠다고 나섰어요.

보디가드에 사진기사, 짐꾼까지. 뭐든 척척 해내는 만능 도우미였죠.


마침 다행히도,

회사 복지로 예약해 둔 숙소는 휴가철이 지나 텅텅 비어 있었어요.

덕분에 우린, 그에게 ‘1인실 숙박권’을 제공할 수 있었죠.

무보수 가이드비’에 대한 보답이랄까요.



낮에는 가볍게 산을 오르고,

밤이면 맥주잔을 사이에 두고

넷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다시 볼 일 없을 거란 생각이,

마음을 오히려 가볍게 했던지...

서로 감춰두었던 첫사랑 이야기도 어느새

스스럼없이 꺼내놓고 있었어요.


그렇게 웃고 떠드는 사이,

어느새 밤은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그 늦여름의 끝자락,

설악동에서 보낸 며칠은 짧았지만

유난히도 깊게 마음에 남았습니다.



함께했던 시간이 어느덧 끝나고

우리는 다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저 짧은 여행의 추억으로만 남을 줄 알았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여행이 자꾸 생각났습니다.


그가 찍어준 사진을 보는데, 괜히 마음이 쓰이더군요

그래서 조심스레 편지를 쓰고,

인화한 사진 몇 장과 함께 부쳤습니다.


그게 마지막 인사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마음,

아니면, 그냥 조금은 아쉬운 감정이었을지도요.


그런데 며칠 뒤,

뜻밖의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안녕하세요, ㅇㅇㅇ입니다. 저 기억하시죠?”


어디선가 많이 듣던, 낯익은 그 목소리.

설악산의 그 여름이 다시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지금도 남편은,

그 얘기만 나오면 어김없이 놀리듯 말해요.

“그때 당신이 먼저 유혹했잖아~”

하긴, 편지에 사진까지 보낸 사람은 나였으니까요.


하지만, 그 말이 나오면 저도 늘 받아칩니다.

“우리 짐 들어주겠다고 따라온 사람은 누군데?”


결국, 누가 먼저였는지는 아직도 가릴 수 없지만,

그런 실랑이마저 우리에겐 웃음 나는 추억이 되었습니다.



요즘처럼 “우리 사귀자” 같은 정식 언질도 없이,

우린 그저 여건이 될 때마다 가끔 만났습니다.

그는 복학을 위해 서울로,

저는 사회생활에 적응하느라 부산에서 바쁜 날들을 보냈죠.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처음엔 편지로 마음을 주고받았고,

그는 거의 매일 한 통씩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서울과 부산—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도,

우리의 이야기는 한 장 한 장, 천천히 쌓여갔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마음만큼은 늘 가까이 이어져 있었죠.


요즘도 남편과 그 시절 얘기를 꺼낼 때면,

우리는 한참을 웃습니다.

우리 둘이 그때 기차값이랑 비행기값만 모았어도

집 한 채는 샀겠다~”


과장처럼 들릴지 몰라도,

정말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쏟아부은 차비만 해도

한 달 월급의 절반은 족히 넘었던 것 같으니까요.

그때나 지금이나, 사랑은 그냥 되는 게 아니었나 봅니다.



물론, 우리가 함께 걸어온 길이 언제나 평탄한 건 아니었어요.

여느 연인들처럼,

때로는 사소한 말 한마디에 마음이 다치기도 했고,

이유 모를 오해로 며칠씩 서먹해지기도 했죠.


한 번은, 그가 진지한 얼굴로

출가하겠다”고 해서 저를 당황하게 한 적도 있었죠.

대학 시절 불교 학생회에서 활동하면서

선배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았어요.


그 순간, 정말 이대로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우리 사이가 흔들렸고,

함께할 미래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되묻게 된 시간이었죠.


그리고 또 어느 날엔,

제가 이번엔 ‘불치병 코스프레’로 반격(?)을 했습니다.

뜻밖의 이별 통보 였죠.

아마도… 그 출가 발언에 대한 은근한 복수(?)였던 것 같기도 해요.


건강검진에서 종양 의심 소견이 나왔을 때,

아직 정확한 진단도 없었지만 무턱대고

이유 묻지 말고, 우리 그만하자”고 말해버렸으니 말이죠.


나중에야 단순한 결핵 흔적이란 걸 알았지만,

그땐 정말 심각한 병인 줄 알았거든요.


소설 속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듯,

혼자 울고 연락을 끊었던 그날도,

지금 돌아보면 참 유치한 ‘밀당’ 아니었나 싶어요.



프러포즈요?

그 시절엔 그런 낭만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무릎을 꿇고 반지를 끼워주는 영화 같은 장면은 없었지만,

서로를 향한 믿음이 자연스럽게 깊어지면서

결혼 이야기가 오갔고,

그렇게 우리는 상견례를 하고 날을 잡았어요.


함께한 7년의 시간이 쌓이면서,

우리는 어느새 지금처럼

같은 길을 나란히 걷는 부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안개 낀 새벽이면, 문득 그날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경포대를 찾아가곤 해요.


여기서 우리 처음 만났잖아~”


그날의 어색했던 첫인사며, 사진 찍던 모습,

무모했던 먹거리 박스까지....

하나둘, 추억을 꺼내 봅니다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그 자리에 여전히 서 있는 경포대처럼

우리의 이야기도 그렇게,

오래도록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요.



어찌 보면 흑백영화 속 한 장면 같기도 한,

그 시절의 이야기가,

다른 이들에게는 평범하게 보일지 몰라도

우리에겐 꺼낼 때마다 웃음 짓게 되는 가장 선명한 추억입니다.


마치 오래된 사진첩을 넘기듯

우리 부부가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함께 쌓아온 시간들을 차근차근 돌아보고 싶어 졌습니다.


무엇보다,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 그리고 엄마로 바쁘게 살아낸 시간을 지나

이제는 인생의 봄과 여름을 건너

가을 문턱에 선 지금 이 시점에 말이죠.


이 글이 누군가에게는

“그래,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하고 조용히 웃음 짓게 하는 이야기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삶의 다음 페이지에도

우리는 지금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따뜻하게, 천천히 걸어가고 싶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