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8일 자로 나는 명퇴를 하였다. 정년이 6년 남았지만 내가 근무하던 지역을 떠나 먼 곳으로 발령이 나야 하는 상황이라 원거리 출퇴근에 대한 부담도 있었고 나이 먹은 선생을 바라보는 젊은 엄마들의 시선과 선입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나는 모태 선생이라 할 만큼 어릴 적부터 쭉 선생이었기에 명퇴 후의 내 삶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갑자기 정한 명퇴가 아니고 8년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거였지만 막상 그 시간이 오니 담담하게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엄마로서 아내로서 자식으로서의 역할보다도 선생으로서의 역할을 젤 잘했고 젤 열심히 했음을 한 점 부끄럼과 후회 없이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선생임에 최선을 다했었다.
초등학교 선생은 아이들을 사랑함은 기본이고 전 과목을 다 아우러야하기 때문에 주지교과는 물론 예체능에 소질이 있으면 조금 더 재미있는 학교생활을 제공할 수 있는데 다행히 체육을 제외하곤 남들보다 약간의 재주와 끼가 있어 학예회에선 튀는 무대를 연출했고 공부도 나름 재미있게 가르쳐서 학생들에게 나름 나쁘지 않은 교사였고 트리플 A형의 성격으로 동학년이나 학교 업무에 남들보다 빠르고 정확히 업무를 해내며 그런 작은 성취감으로 내가 선생임에 만족하며 살았었다.
그래도 끝은 다가오고 있어 2020년 1월 3일을 끝으로 마지막 수업, 마지막 출근이 되어버렸다.
생긴 건 서울깍쟁이처럼 생겨 남들로부터 착하다는 소리 한 번 듣지 못하고 살지만 유난히 정에 약해 아이들과 헤어지는 방학식은 물론 학년말 종업식엔 아이들보다 더 많이 우는 눈물 많은 선생인 나는 마지막 수업을 나름 잘 끝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현관까지 배웅하며 결국 터졌고 그날부터 몇 날 며칠을 울음으로 지냈다.
내 꿈이 아닌 우리 아빠의 꿈으로 시작된 선생질이 나의 천직이 된 건 발령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이다. 그래서 나는 모태 선생이 되었고 죽으나 사나, 내가 아프거나 내가 낳은 내 새끼가 아파도 난 늘 학교와 우리 반 아이들이 먼저였다.
눈물로 키운 내 새끼 내 아이가 아파도 어린 꼬맹이를 집에 두고 출근하고 게다가 잠시 잊고 수업을 하고 허겁지겁 퇴근하여 아픈 아이에게 미안해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서른이 다 된 우리 막내가 어릴 적에 그랬다.
"엄마는 학교에 가면 참 친절하고 좋은 사람인데 집에 오면 소리도 지르고 화도 내고 참 이상해"
" 집에선 월급을 안주지만 학교는 월급을 주잖아"
꼬맹이가 알아듣기 젤 쉬운 말이라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적어도 내가 받는 월급값은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선생을 했었다. 그래서 부끄럽지 않은 선생이 되려 했고 많은 엄마들이 아이들을 학교에 자식을 맡기며 기대하는 교육적 성장의 희망을 알기에 거기에 부응해야 하는 책임감을 열심히 수행하려 노력하였다.
그런 내가 명퇴를 했으니 그 허탈함과 상실감은 너무나 컸다. 더 이상 내가 선생이 아님이 너무나 슬펐다. 더 이상 들리지 않을 아이들의 깔깔거림과 선생님을 찾던 그 눈빛이 너무나 그리웠다. 그래서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기로 했다
내 교직 생활 34년을 하루씩, 하나씩 꺼내보며 살면 참 오랜 기간 동안 그나마 선생이었던 것을 추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