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줌마 Aug 20. 2020

청소기를 플렉스(FLEX) 해버렸다

현대인이란 미명 하에 편리함으로 위장한 게으름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인간은 자연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도구를 만들고, 도구에 의존해서 삶을 꾸려나가는 도구의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고 한다. 그 인간의 무리 중에 능동적으로 도구를 만들지는 못하나 적극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내 나름대로 이름 붙여서 수동적 호모 파베르, 바로 나다. 

호모 파베르를 주제로 한 발레 공연 포스터

  

밥은 전기밥솥, 빨래는 세탁기, 말리기는 건조기, 설거지는 식기세척기, 청소는 청소기 정도는 이제 보편화되었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플렉스 해버린 것이 바로 청소기이다.  

   


내가 청소기를 제일 먼저 사용한 시기는 신혼 초였다. 보너스를 받은 남편이 선물이라며 사준 빨강 청소기. 작은 신혼집에 어울리는 작고 귀여운 청소기였다. 빗자루로 쓸고 쓰레받기에 모아서 휴지통에 버릴 때 휴지통 밖으로 날리던 먼지가 거슬렸는데 그것이 없어지니 좋았다. 2년도 안 쓰고 서울로 이사 오면서 동생한테 주었다.    

그 후로도 계속 청소기는 모델이나 사양을 바꿔가며 늘 우리 집의 청소를 책임졌다.

   

한참 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우리 집의 청소기에도 변화가 왔다.

먼지를 흡입하는 부분에서 미세먼지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으니 자신의 회사 제품을 써야 한다는 CF를 믿고 다른 청소기에 비해 2배에 달하는 거금을 들여 미세먼지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청소기를 샀다. 눈으로 보이지 않으니 그 효과를 말할 수 없었다.    


청소기를 끌고 다니는 것도 힘들고 귀찮아 집을 넓혀가면서 로봇청소기를 샀다. 이번에는 강아지가 문제였다. 우리 사랑이는 청소기 소리를 제일 무서워하는데 로봇청소기가 소리를 내면서 자기를 졸졸 따라다닌다고 생각하여 너무 짖어대는 바람에 로봇청소기 OUT.    


나이가 들면서 무릎이 시큰거려 유선 물걸레 청소기를 샀다. 아무리 청소기를 사용해도 바닥의 먼지는 어쩔 수 없어 늘 기어 다니며 손걸레질을 했었다. 많은 사람이 대 걸레질할 때에도 무슨 청소 투사라도 된 듯이 내 맘에 들게 깨끗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갇혀 손걸레질을 하는 미련함이 있었는데 물걸레 청소기는 내 맘에 쏙 들었다. 다만 무겁고 중간중간 걸레를 갈아주어야 하니 걸레의 수가 많아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도 꽤 오랫동안 우리 집의 청소 주역이 되었다.     


어느 날부터 무선 청소기가 유행하였다. 드라마 등에 슬쩍 등장하여 청소하는 모습이 너무 편해 보였다. 유행에 뒤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멀쩡한 청소기를 두고 값이 꽤 나가는 무선 청소기를 샀다. 무선의 편리함이 좋긴 하지만 내겐 너무 무거웠다.

   

무거운 청소기 두 개로 청소를 하자니 힘이 들어 가끔 물걸레 청소포나 정전기 청소포도 사용하였다. 별로 깔끔하지도 못하면서 왠지 찝찝함은 남았지만, 그런대로 지내던 중 여동생이 신제품을 알려주었다.

바로 로봇 물걸레 청소기.

무선이니 들고 다니며 청소하지 않아도 되고 급수통이 있어 걸레가 마르지도 않는다. 조그만 게 로봇청소기랍시고 혼자서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청소하는 것이 귀여웠다. 바닥 청소도 웬만큼 잘되어 맘에 들었는데 사랑이도 10여 년의 세월 동안  수없이 변한 청소기에 익숙해졌는지 짖지 않았다. 다행이다. 쾌거이다.    


전에 쓰던 로봇청소기를 다시 꺼냈다. 두 개의 로봇청소기가 돌아다니며 청소를 했다. 두 개의 소음이 귀에 거슬렸지만 내 몸 하나 편한 것이 좋아 그런대로 참을 만했고 사랑이가 요리조리 발을 들어 피해 가는 모습도 귀여웠다. 견생생활 14년 만에 사랑이가 도그 파베르(Dog Faber)가 되었다.    


나의 참을성에 문제가 생겼다. 두 개의 청소기의 소음과 길어도 너무 긴 청소시간이 거슬렸다. 이 두 가지를 한 번에 해결할 청소기가 필요했다. 마침 청소기를 살 수 있을 정도의 공돈이 들어와 마지막 청소기라고 나 자신에게 변명하며 물걸레질을 할 수 있는 로봇청소기를 샀다. 물걸레질도 되고 흡입력도 좋고 괜찮았다. 더 닦아야 할 곳은 로봇 물걸레 청소기로 한 번 더 닦아주니 이제 더 청소기는 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독립하여 나가서 사는 딸이 주말에 왔다.

“엄마, 로봇청소기 새로 샀으니 돌돌이(로봇 물걸레 청소기) 주면 안 돼?.”

나도 주방 청소나 현관 청소 따로 할 때 필요한데 전부터 돌돌이를 탐내던 딸이 달라고 하니 줄 수밖에 없었다. 무겁지만 가끔 쓰는 것이니 유선 물걸레 청소기를 사용하면 될 것 같았다.    

나 : “돌돌이 써봤니?”

딸 : “아니 아직”

나 : “ 청소도 잘 안 하면서 왜 가져갔대? 주방엔 돌돌이로 한 번 더 돌리면 확실히 깨끗해지는데 ㅠㅠ”

남편: “그래? 필요하면 내가 사줄게.”

나 : “ 괜찮아. 큰 물걸레 청소기로 하면 돼 ㅠㅠ”    


남편이 돌돌이를 또 샀다. 사버렸다.   

 


우리 집 청소기의 역사를 살펴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힘들다.

무겁다.

귀찮다.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이유 같지 않은 이유이다.

현대인이란 미명 하에 편리함으로 위장된 나의 게으름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 아니더라도, 손끝 야무지게 부지런한 주부들이 흉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라떼는 말이야 하며 빗자루와 걸레만 있어도 마루가 반질반질했어라며 핀잔을 주어도 할 수 없다. 발전하는 과학문명의 공급량에  따라 수요량도 늘어나는 시대이다. 지금을 사는 나는 편리함을 이유로 그 수요량에 플러스 1을 하며 내 몸은 점점 게을러지고 수많은 도구에 쌓인 채로, 때로는 도구에 파묻힌 채로 살아가는 모습이 되었다.


이제 그 게으름에서 벗어나 내 몸이 도구가 되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

청소는 청소기에 맡기고 그 시간에 나는 나의 손과 머리, 감정을 도구로 하여 글을 쓰기로 했다.

언젠가 내 글이 플렉스 되는 날을 기다리며......

ps: 절대 청소기 선전의 의도는 없습니다.


그림 출처 : 블로그 굴렁쇠 민속품 , 블로그 바른 글씨 문화연구소, 대학로 예술극장 포스터

매거진의 이전글 브런치福이 활짝 피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