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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줌마 Aug 11. 2020

밭 할머니의 경고문

서리의 추억은 옛날 이야기 일 뿐이다.

우리 동네 산책로 옆에 밭이 있다. 

브랜드 아파트 담장 밑에 있는 자그마한 밭으로, 남편과 나는 아파트 지을 때 같이 포함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땅값이 꽤 높을 텐데 하며 각자 사정이 있어 저렇게 도심 속 아파트 옆 자그마한 밭으로 남아있나 보다 라고 남의 땅의 효용가치를 아까워하곤 했다.  

  

모두들 유기농이니 무농약 작물을 선호하는 요즈음에 밭에서 직접 기르고 수확하여 먹고살면 키우는 재미는 물론 건강에도 좋겠다 하며 그 밭의 농작물을 부러워하며 지나다녔다. 나는 퇴근 후 늦은 시간이나 주말을 이용해 산책을 하니 그 밭의 주인이 일하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상추부터 열무 옥수수 고추 토마토 콩 고구마 그 외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작물들로 재배되어 있는 걸로 보아 꽤 부지런한 분일 것이다. 작물의 종류뿐 아니라 양도 많아 아마 사돈의 팔촌까지 나눠먹어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밭엔 사시사철 튼튼한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웃긴 것은 가끔씩 그 밭을 지나면 집에 방울토마토가 있는데도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울타리가 있는 그 밭의 방울토마토를 따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초여름 여린 열무 잎이 나오는 것을 보면 괜히 그걸 따서 밥을 비며 먹고 싶어 진다. 착하게 살지는 못해도 도덕적인 규율은 꼭 지키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왔는데 왜 그런 마음이 생기는지......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나는 이상하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한 개쯤 따는 것은 왠지 스릴 있고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뿐 그렇게 나쁜 짓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주인 몰래 따가는 사람들이 있는지 가끔 그 밭에 가면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고생해서 키운 작물이니 따가지 마라 등의 내용이었다. 가끔 양심 없는 인간들이니 하는 말도 있었지만 주인이 화났나 보다 라고 생각하며 지나쳤다. 내가 가져간 것은 절대 아니니.   

 

수박서리는 권선징악이 아닌 약간의 벌이나 혼남 등으로 그치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미담으로 듣고 자랐다. 나도 서리의 미담만 들었지 직접 해본 적도 서리를 하는 사람도 본 적은 없다. 그 밭에서 작물을 가져간 사람들도 아마 서리에 대한 추억이 있는 사람이거나 해피앤딩의 미담만 들은 사람들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더운 여름 땀 흘리며 고생하여 키운 밭주인 입장에서는 화가 나서 경고문을 붙인 것이다.     


며칠 째 폭우가 내리던 어느 날, 비가 잠깐 잦아들어 남편과 우산을 들고 산책을 나섰다.

개울의 오리들은 폭우를 잘 피하고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나도 눅눅한 집안에 있는 것보다 바깥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폭우로 물이 불어 개울물은 황토색으로 변해있고 졸졸거리던 물소리는 어느새 콸콸거렸고 폭우 속 오리는 물가 풀숲에 숨어 있거나 물을 피해 도로 위로 나와 있었다. 사람이 지나가면 물속으로 들어가는 오리도 있고 용감한 오리 몇 마리는 사람이 와도 개의치 않고 도로 위를 활보하는가 하면 아예 개울 옆 도로에 심어진 나무 밑에 자리를 잡기도 하였다.

개울물이 불어나 도로 위로 나온 오리, 사람을 믿고 있는 오리

“이 오리들은 우리를 믿나 봐, 사람들이 자기들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으니 사람들이 옆에 와도 피하지 않지.”

남편과 나는 사람들을 믿어준 오리들이 신기하기도 하고, 오리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믿게 한 환경의식도 괜찮아진 것 같다며 흐뭇해했다.   

 

그러나 잠시 후 밭 할머니가 쓴 격앙된 문구의 경고문에 오리가 준 흐뭇함은 망가져버렸다.  

              

도둑질 하지 마라는 밭 할머니의 경고문, 사람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몇 번씩 울타리에 붙은 경고문을 보았으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나처럼 장난스러운 스릴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행동으로 옮기지는 말았어야 했다. 세상이 변해서 서리라는 행동의 미담은 사라졌으며 그 실체는 도둑질이 된 세상이다.    

 

모두들 장마에 지치고 예민한 신경이 극에 달했나 보다.

밭 할머니라는 분의 경고문이 이번엔 무섭다. 화가 단단히 났나 보다. 그래도 너무 심하게 표현된 Xoo니 쌍 o은 그 경고문을 보는 다른 사람들의 기분은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밭 할머니의 욕도, 남의 수고로움을 재미나 장난으로 여긴 행동도 씁쓸하다.  

  

오리에게 부끄러웠다. 아직은 사람을 믿을 때가 아니라는 걸 오리도 알아야 할 텐데.    

서리가 도둑질이 된 세상에서 서리의 주인공은 이제 절대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세상임을 나도 다른 이들도 깨달아야 한다. 욕을 먹었으니 이제 정신을 차리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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