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이 호박다워야 호박죽이지.
매일 아침 10시,
동네 큰 마트의 친절한 세일 안내 문자에 즉각 반응하게 된다. 오늘은 뭐를 건질까? 그날의 세일 품목에 따라 저녁 메뉴가 정해질 때도 있다.
늙은 호박 4500원
늙은 호박으로 부침개를 해서 달달하니 맛있게 드셨다는 엄마의 말이 생각나 주저 없이 늙은 호박을 샀다. 늙은 호박은 사는 것도, 요리하는 것도 처음이다. 호박이 호박이지 별거 있을까 싶어 아무 생각 없이 샀다.
첫 번째 도전 호박죽
검색을 하니 한 시간 정도면 호박죽이 된다.
엄마에게 호박죽의 팁도 얻고 해서 저녁 메뉴로 늙은 호박죽 당첨.
엄청나게 크고 무거워 자르고 다듬는 것도 만만치 않겠다 싶어 서둘러 시작했다. 칼과 필러를 이용하여 우여곡절 끝에 사 분의 일 조각을 준비하였다.
언젠가 늙은 호박만으로 끓였다는 호박죽을 사서 먹었었는데 그 맛이 좋았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늙은 호박과 단호박을 함께 하면 더 달고 맛있다는 엄마의 조언은 과감히 패스.
씻고 다듬고 삶고 믹서기에 갈고 마지막으로 찹쌀가루와 호랑이콩까지 넣어 이제 잘 저어가며 끓이면 된다. 이것만 해도 한 시간이 넘었다. 일찍 시작하길 잘했다.
그러나 시작만 잘했을 뿐 세 시간 넘도록 끌탕을 했다.
너무 묽다.
호박 1킬로에 물 900밀리라고 했는데 호박 삶은 물을 생각지 않고 900밀리를 넣은 것이 화근이었다. 찹쌀가루를 넣어도 소용이 없다. 더 끓여도 졸아들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얼른 호박을 조금 더 삶고 갈고 해서 넣었다. 그래도 묽다. 조금 더 조금 더 하다 보니 호박 반 통을 다 넣었다. 냄비 가득 양이 너무 많다.
단맛이 안 난다.
단 것을 싫어하여 설탕을 조금 넣었다. 안 달다. 조금 더 넣었다. 그래도 안 달다. 조금 많이 넣었다. 그래도 안 달다. 확 부어 넣었다. 너무 달다. 엄마 말을 들었어야 했다.
고소하니 호박죽 맛이 안 난다.
단맛을 고소한 맛으로 중화시키면 될 것 같아서 깨를 조금 넣었다. 달다. 조금 더 넣었다. 그래도 달다. 확 부어 넣었다. 고소해서 호박죽 맛이 안 난다.
호박이 호박다워야 호박죽이지, 이건 뭐 고소하니 호박죽도 아니고 깨죽도 아니고, 내가 기대했던 늙은 호박의 맛은 고사하고 일반적인 호박죽 맛도 안 난다. 호박죽은 망했다.
고소하다고 다 맛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봉지봉지 담아 냉동실에 넣어두고 아침마다 먹고 있다.
두 번째 도전 호박 부침개
남편 때문에 부침개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호박이 너무 많이 남았다.
채칼로 썰어 부침가루 약간 넣으면 그걸로 끝이니 간단하다. 이미 한 번 망했던 나를 믿지 못하겠는지 남편이 “부침가루를 더 넣어야 하지 않을까?” 참견한다. 부침가루를 조금 더 넣었다. 물을 더 넣었다. 프라이팬에 넣으니 호박의 노란색에 숨겨져 있던 흰 반죽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호박보다 반죽이 너무 많다. 밀가루 떡 같은 부침개다. 부침개도 망했다.
과하면 모자란 만 못하다.
그래도 남편은 맛있다고 잘 먹었다.
늙은 호박은 괜히 늙은 호박이 아니다.
애호박이 예쁜 모습과 보드라움을 자랑하며 떠날 때, 그 자리에서 따가운 여름 햇볕과 소나기를 맞으며 투박하고 단단하게 익어갔다.
나잇값만큼 이름값만큼 농익어온 시간을 깊은 맛으로 끌어냈어야 했다.
애수박, 애토마토도 없고 늙은 수박, 늙은 토마토가 없듯이 늙은 호박만의 존재를 가볍게 여기지 말았어야 했다.
섣불리 덤비고, 참깨와 부침가루를 들이붓다 늙은 호박에 제대로 큰코다쳤다.
돌아보니 내가 맛없는 호박죽이다.
누군가의 존재 자체를 존중했었나?
누군가의 나잇값을 이름값을 존중하며 살았나?
잘못을 감추려 다른 행동으로 덮으려 하지 않았나?
욕심을 부리며 살지 않았나?
늙은 호박은 아직 많이 남아있다.
맛있게 요리해서 늙은 호박의 맛을 제대로 맛보아야겠다.
내 인생도 아직 많이 남아있다.
맛있게 살아서 큰코다치지 말아야겠다.
호박이 호박다운 맛있는 호박죽이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