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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줌마 Dec 07. 2020

아들의 와이셔츠를 다리다가 문득 엄마 생각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정말 웃긴다.

월요일에 출근하려면 와이셔츠를 다려야 하는데 아들의 움직임이 없다.

심각한 코로나 상황으로 방콕이니 내내 잠만 자는 듯하다. 한차례 이야기를 했는데 대답만 할 뿐 아들의 방문은 열리지 않고 문틈으로 빛도 새어 나오지 않는다. 내일 아침까지 쭈욱 자려나 보다. 이대로 두면 세탁기에서 그것도 탈수 강으로 비틀어진 구김이 있는 와이셔츠를 입고 출근할 것이다.    


아들이 금요일에 연말 선물이라며 마사지 건을 사주었다.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이번엔 와이셔츠를 다려줄까? 너무 속 보이는 것 같지만 구겨진 와이셔츠를 입고 출근하게 할 수는 없어서 와이셔츠 5장을 다리기 시작하였다. 오랜만에 와이셔츠를 다림질하니 여기저기 구김이 남아있고 손가락도 아프고 덥고 힘들었다. 옛날 실력이 나오지 않는다.    


남편은 사시사철 양복을 입는다.

결혼 초, 와이셔츠 다림질은 무한 구김의 굴레에 빠졌다. 앞을 다리면 뒤가 구겨지고, 소매를 다리면 다시 앞이 구겨졌다. 땀을 흘리며 와이셔츠와 전쟁을 치르는 것을 보다 못한 남편이 다림질했다. 군대를 갔다 오면 칼 주름 칼 각의 다림질의 도사가 된다더니 진짜였다. 자기 옷이니 자기가 다려 입는 것이 당연한데 신혼 주부의 역할을 글로 배운 나는 엄청 고맙다고 생각했다.    


신혼이 지나고 와이셔츠 다림질은 스멀스멀 내 몫이 되었다.

마침 육아휴직 중이기도 하였고 남편은 회사생활로 엄청 바빴다. 주중에 빨래를 개고 다림질을 하게 되면서 와이셔츠 다림질의 고수가 되어갔다. 5분도 안 걸리는 시간에, 구긴 흔적도 없이 후딱 1장을 다렸다. 툭툭 털어 말린 티를 그냥 입을 때와 잘 다려진 티를 입은 아이들의 모습은 예쁨의 정도가 다르다. 그렇게 아이들 면티도 구김 없이 다려 입히게 되었다    


마흔이 되면서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기 시작하였다.

서툰 솜씨로 글로 배운 살림과 육아를 완벽히 따라 하려니 욕심만큼 할 수 없으면서 나는 힘들었고, 3년의 육아휴직 기간을 제외하고 15여 년 동안 직장생활을 병행하다 보니 내 몸이 아프다고 신호를 보내왔다.    


그때부터 다림질은 남편 몫이 되었다.

한참 동안 다림질을 안 해서인지, 귀찮아서인지 남편이 다린 와이셔츠에도 여기저기 구김이 남아있을 때가 있었다. 아이들 교복이 그렇게 되어 있는 날은 구시렁거리며 내가 다시 다렸다.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면서 교복 다림질도 끝이 났다.    


아들과 딸이 직장을 다니게 되면서 다시 다림질을 하게 되었다.

첫 면접을 보는 날, 엄마가 잘 다려주는 옷을 입고 가면 면접을 잘 볼 것 같았다.

첫 출근을 하는 날, 엄마가 잘 다려주는 옷을 입고 가면 직장생활을 잘할 것 같았다.

직장생활로 힘든데 그 정도는 엄마가 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집에 있게 되면서 남편의 와이셔츠도 가끔 다려주었다.    


갱년기로 손가락이 아프다.

다림질하면 너무 덥고 귀찮고 하기 싫다.

남편 옷은 남편이, 아들 옷은 아들이 다시 다리게 되었다.   

 

나의 다림질은

처음엔 다림질을 잘못해서 남편이 했고

열심히 다림질을 하며 살다가, 

마흔 즈음엔 아프고 힘들어서, 이제는 귀찮고 하기 싫어서 하지 않는다.   

  


아들의 와이셔츠를 다리다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뱀 껍질처럼 옷을 벗어던지고 양말은 벗어놓은 곳이 제자리인 것처럼 지냈던 나는 결혼 전까지 다림질은커녕 내 옷이며 양말 한 짝도 빨아본 적이 없다. 1남 3녀의 엄마였던 엄마도 힘이 들었을 텐데, 더구나 그 시절에 세탁기도 전기밥솥도 없었는데, 엄마도 갱년기를 지났을 텐데 우리는 아무도 엄마가 힘들어하는 줄 몰랐다. 요즘 갱년기로 힘들다는 내 말에 엄마는 그 옛날 갱년기가 뭔지도 모르고 살았다고 했다. 집안일은 당연히 엄마가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살았다. 엄마는 아프지도 않았던 것 같다.  

   

아빠가 와이셔츠를 입는 일은 평생에 몇 번 되지 않았다.

다림질의 굴레는 없었어도 꼬박꼬박 제날짜에 월급이 나오는 직업이 아니었으니 엄마의 갱년기나 빨래는 힘든 것이 될 수 없었다.    

 

자식인 우리는 그때의 엄마는 우리가 공부 잘하고 모범생으로 자라는 것만으로 그 힘든 시절이 힘들지 않았다고 착각하였다. 그때의 엄마는 괜찮아서, 견딜만해서 견뎠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엄마도 지금의 나처럼 살았으면 힘이 덜 들었을 텐데 다정한 아빠도 모범생 자식도 누구 하나 대신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렇게 살 수가 없었다. 그 시절의 아빠와 우리는 그걸 몰랐다. 엄마에게 죄송하다.    


이런 시대에 살게 되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다림질도 하기 싫다고 말할 수 있는 내가 되어서 다행이다.

아프면 아프다고, 갱년기로 힘들면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내가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아프다고 힘들다는 나를 이해하고 나를 대신하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 정말 다행이다.    


그 시절 엄마의 힘듦을 생각하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정말 웃긴다.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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