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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줌마 Sep 03. 2021

내겐 너무 가혹한 까까머리의 추억

실망, 서운, 엄마는 너무해.


생후 50일에 집에 온 나는 동물병원에서 알려준 각종 예방접종 일정 및 조심해야 할 사항이 많았다. 

100일이 될 때까지는 감기도 조심해야 한다며 목욕도 하지 못하게 했다. 의도하지 않게 쉬와 응가를 쌀 때도 있어 나도 찝찝하고 엄마도 찝찝한 상태로 100일까지 참아야 했다.


드디어 100일!

이제 깨끗해질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엄마와 함께 동물병원에 갔다. 첫 목욕은 간호사 선생님이 해주시고 엄마는 옆에서 강아지 목욕시키는 방법을 배웠다. 딱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았을걸........

나는 빡빡머리 아니 빡빡 몸뚱이가 되어버렸다. ㅠㅠ


실키 테리어는 100일에 배냇 털을 밀면 새까만 털이 스틸블루라는 색으로 바뀌며 윤기도 더해지고 찰랑찰랑 직모로 바뀌어 사랑이의 외모가 한층 아니 그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다며 간호사가 사랑이의 완모를 권하셨다. 그렇게 7번을 털색이 변하며 멋있는 강아지로 자란다고 하니 당연히 배냇 털을 미는 것에 동의하였다.

배냇머리를 밀면 머리카락이 더 굵고 새카맣게 난다고 우리 아들도 100일 즈음에 빡빡머리를 했었기에 별 부담 없이 사랑이의 배냇 털 밀기를 하였다. 사람과 강아지이지만 다 같은 아기이니 그런가 보다 생각하였다.


아이코!

배냇 털을 싹 밀어버린 사랑이를 건네주는 간호사에게서 받지 못하였다.


아들은 머리만 빡빡이여서 귀여웠지만 사랑이는 몸 전체를 밀어버려서 완전히 다른 강아지가 되어버렸다. 

심지어 그 조그마한 몸에 털이 하나도 없으니 만질 수가 없었다. 잘못 안아서 뼈가 다 드러나는 사랑이의 몸이 다칠까 봐 겁도 나고 솔직히 무서웠다. 털이 없는 맨살 몸의 촉감은 사랑이인 줄 알면서도 징그러운 것 같았고 그동안 털로 쌓여있던 얼굴의 윤곽이 뼈만 있는 채로 드러나니 전혀 다른 모습이라 우리 사랑이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남편이 조심스럽게 받아 안고 동물병원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유난히 더 커 보이는 까만 눈을 보니 그제야 미안한 마음이 들어 사랑이를 안아주었다. 물컹하는 촉감이 여전히 겁나긴 했지만 졸지에 온몸의 털을 다 깎여버린 사랑이의 마음은 더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 미안하기도 했다. 얼마나 힘든 기억이 될까 걱정이 되었다.



낯선 사람과 처음 하는 목욕도 힘들었다.

하지만 엄마도 옆에 있고 100일 동안 씻지 못해 찝찝했었는데 깨끗해진다고 하니 처음 접해본 물이나 목욕세제의 불편함도 참았다. 그런데 갑자기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배냇 털을 싹 밀어버리다니 이건 정말 너무하였다. 큰 길가에 발가벗긴 채로 내버려진 느낌이다. 나도 이런 내 모습이 이상하다. 부끄럽기도 하고 기분도 나쁘다. 


 털이 깎이고 내 몸이 벌거숭이가 되어가면서도 엄마를 생각하면서 견뎠다.

"우리 사랑이 잘 참고 잘했네. 목욕도 잘하고 털도 잘 깎네. 우리 사랑이는 털을 깎아도 예쁘네 "가 들리는 듯하였다. 엄마는 나의 힘든 마음을 알아주실 거라 생각하며 얼른 이 시간이 지나고 엄마 품에 안기면 이 모든 상황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하였다.

 

실망, 서운, 엄마는 너무해.

털이 없는 나를 알아보지도 못했고 심지어 무서워하며 안아주지도 않았다. 겨우 아빠 품에 안겨 집으로 돌아오면서 얼마나 서러웠는지, 나중에야 엄마가 안아주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봐 ㅠㅠ

100일 맞이 이벤트치곤 정말 너무해.

흥, 다시 삐뚤어질까 보다.


7번의 변신, 멋짐 뿜뿜의 길, 참 쉽지 않다.

털이 새로 자라면서 나는 진짜 아주 많이 엄청 예쁜 털로 완전 변신을 하였다. 

15년 동안 두 번 정도 완전히 털을 깍았지만 100일의 배냇 털 밀기는 내겐 너무 가혹한 까까머리의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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