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을 건너온 새벽의 목소리

잡음 너머로 흘러오던 마음들

by dearMe

집에서 아이 학교까지 차로 10분 거리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아이를 학교에 통학시키는 일은 내가 하는 일 중에 가장 큰 일이자 번거로운 일이다. 거실을 굴려 다니며 “잠깐만”을 외치는 아들을 시간 맞춰 학교에 들여보내고 나면, 하루치 중노동의 반은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루는 아침 등굣길에 아들이 차 시트 열선 버튼과 온도 조절 버튼을 찾다 라디오 버튼을 가리키며 이건 뭐냐고 물었다. 아들은 라디오 모양의 이모티콘 자체를 처음 본 것이다. 지금 타고 다니는 차는 블루투스로 스마트폰과 바로 연결되기에, 나 역시 라디오 버튼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지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들이 태어난 이후 팟캐스트는 많이 들었지만, 라디오를 들려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아들에게 직접 버튼을 눌러보라고 했다. 버튼을 누르자마자 경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김영철의 파워 FM’이었다. 권진영 님과 함께하는 코너에서 재미있는 사연이 소개되자, 아들은 배를 잡고 깔깔 웃으며 한동안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결국 그날 하교 후 고릴라 앱을 아들 스마트폰에 설치해 주었다. 아들은 라디오를 들으며 그림을 그리고, 레고 놀이를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문득 라디오 없이는 살 수 없었던 내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내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주말드라마만큼이나 인기 있었다. 반 아이들 대부분이 라디오를 들었고, 라디오에 사연이 한 번 소개되는 것이 소원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나 역시 여러 번 엽서를 보냈지만 번번이 읽히지는 못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가장 좋아했던 방송은 ‘FM 영화음악 정은임입니다’였다. 새벽 3시에 시작되는 방송이었기에 매일 들을 수는 없었지만, 수험생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는 늦게까지 공부했다는 증거처럼 새벽에 들은 라디오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다.

고3이 되던 해 겨울방학,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다짐을 적어 크리스마스 인사와 함께 방송국에 엽서를 보냈다. 여러 번 보냈지만 소개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좋아하던 아나운서에게 인사를 전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엽서를 보낸 지 며칠 뒤, 새벽 정은임 아나운서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타고 내 이름이 불려 나왔다.

“분당에서 이○○ 님…”

시간은 새벽 4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혼자 깨어 있던 그 새벽,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내 이름을 듣고 가슴이 얼마나 떨렸던지 모른다. 소개만 된 것도 아니었다. 영화 티켓과 OST까지 선물로 받았다.

세월이 흘러 그 사건은 기억에서 까맣게 잊혀 있었다. 아들이 엄마도 라디오에 사연을 보낸 적이 있냐고 묻기 전까지는.

그날, 아들에게 그때 이야기를 들려주다 문득 정은임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아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어졌다. 내가 느꼈던 그 감성을 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 말이 길어지자 아들은 어느새 다른 데로 가버렸다. 역시 아이는 아이였다.

혼자 남은 나는 정은임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찾기 시작했다. 디지털의 시대는 놀라웠다. 누군가 ‘FM 영화음악 정은임입니다’를 팟빵에 모두 올려두었던 것이다. 에피소드 하나를 골라 재생 버튼을 누르자, 기억 속에 담겨 있던 그 목소리가 그대로 흘러나왔다.

대략 연도를 계산해 추정되는 달부터 듣기 시작했고, 몇 개의 에피소드를 지나자 수십 년의 시공간 너머로 사라진 줄 알았던 바로 그 순간이 다시 내게 찾아왔다.

“분당에서 이○○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