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시간 거리의 헌책방
요즘 들어, 내가 어릴 적 좋아했던 책을 아이도 함께 좋아해 주는 순간이 늘었다. 아이는 책장 깊숙이 있던 오래된 책들을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반짝이는 눈으로 들여다보고, 누렇게 바랜 책장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오래된 책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나는 어릴 적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책을 구경하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이는 대형 서점이나 알라딘, YES24 중고서점 같은 곳은 여러 번 가봤지만, 내가 다니던 작은 헌책방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엄마, 그런데 나도 가보고 싶다!”
아이의 말에 아직 그런 가게가 남아 있는지 찾아보았다. 집 근처에는 없었고, 서울 청계천 헌책방 거리도 최근 많은 곳이 문을 닫았으며 도매만 취급하는 가게들만 남았다는 글을 읽었다. 그 글이 사실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이를 데리고 서울까지 갔다가, 문 연 가게를 하나도 보지 못하면 너무 실망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헌책방은 이제 사라졌다고 말하기도 왠지 쓸쓸했다.
이리저리 찾아보던 남편이 자신이 어릴 적 다니던 헌책방이 아직 있다고 했다. 문제는 그곳이 대구에 있다는 점이었다. 집에서 차로 달려도 네 시간은 걸리는 거리였다.
우리는 한참 고민하다가 부모님께 인사도 드릴 겸, 경주박물관에서 열리는 신라 금관 전시도 볼 겸 대구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사실 우리의 가장 큰 목적은 헌책방이었다.
금요일 저녁 대구에 도착해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아침 경주박물관을 다녀왔다. 점심을 먹고 헌책방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아이에게 계속 말했다. 네가 원하는 책이 없을 수도 있고, 생각했던 곳과 다를 수도 있으니 너무 기대하지 말라고. 사실은 아이보다 나 자신을 달래고 있었다. 어릴 적 기억 속 헌책방이 현실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면, 그걸 받아들일 자신이 없을 것 같았다.
가게 앞에 도착하자 ‘백년가게’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선대부터 이어져 가게 문을 연 지 정말 백 년이 넘었다고 했다. 가게는 모두 세 층이었고, 바닥부터 천장까지 그야말로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공기처럼 가게 안에 깔려 있었다. 두툼한 겨울 점퍼를 입은 채, 좁은 책장 사이에 몸을 끼워 넣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아들은 상기된 얼굴로 “보물이 곳곳에 숨어 있다”며 요즘 아빠와 함께 빠져 있는 스타크래프트 관련 책 두 권과 로알드 달 책 한 권을 들고 왔다. 책을 고르고 계산하려고 보니, 가게에 들어온 지 놀랍게도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체감상으로는 고작 이십 분쯤 지난 것 같았는데 말이다.
사장님은 책을 한 권씩 계산했다. 만 원이 넘는 책도 여러 권이었고, 생각보다 가격이 저렴하지는 않았다. 아직 가격이 매겨지지 않은 책들은 사장님이 한 권에 삼천 원씩 정해 주셨다. 계산을 마치고 나가려는데, 사장님이 말했다.
“헌책방에 왔으면 커피 한 잔 마시고 가야지요.”
그냥 인사만 하고 나갈 생각이었지만, 우리는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믹스커피를 타 주실 줄 알았던 사장님은 뜻밖에도 원두를 직접 갈아 융 필터로 커피를 내려 주셨다. 예상치 못한 진한 커피 향에 한 번 놀라고,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던 구한말 교과서가 한 권에 백만 원이라는 말에 또 한 번 놀랐다.
사장님의 이야기는 청산유수처럼 이어졌고, 우리는 정신이 쏙 빠진 채로 그 시간을 통과하고 있었다. 저녁 먹으러 오라는 어머님의 전화가 없었다면, 사장님과 함께 셔터 문을 내릴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집에 와서 찾아보니 어떤 책은 시세보다 비쌌고, 어떤 책은 싸게 산 것도 있었다. 사실 가장 싼 책을 원했다면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품에 꼭 안고 돌아온 그 책들은 가격표로는 계산할 수 없었다. 우리가 헌책방에서 산 것은 오래된 책 몇 권이 아니라, 다음 세대로 건너간 기억 한 장이었을 것이다.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즈음에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져 있을지도 모를 기억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