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뇌의 사용 설명서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나는 왜 늘 이렇게 헷갈렸을까

by dearMe

『무의식이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를 읽다 흥미로운 테스트를 하나 발견했다. 맹점을 확인하는 간단한 실험이었다. 지시 사항도 단순했고, 나는 분명 그대로 따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에 설명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먼저 읽은 남편에게 물어보니, 그는 문제없이 잘 됐다고 했다. 오히려 나에게 다시 한번 말로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그제야 이유를 알았다. 나는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을 헷갈렸고, 동그라미를 보라고 했는데 십자가를 보고 있었다. 짧은 지시문 속 명사 두 개를 동시에 잘못 읽은 것이다.

순간 허탈함이 밀려왔다.

내게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 소리 내어 책을 읽다가 전혀 다른 단어를 말해버리거나, 말하려던 단어 대신 엉뚱한 단어가 튀어나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남편은 오래 봐와서인지 “또 그랬구나” 하고 넘길 만큼, 나에게는 꽤 빈번한 일이었다.

나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덤벙거려서, 정신이 없어서, 성격이 급해 마음이 말보다 앞서가서 그런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설명하고 말아 왔다. 그날도 별 기대 없이 AI에게 물어봤다.

‘혹시 이런 이유가 있을까?’

기대 없이 던진 질문에 인공지능은 뜻밖의 답을 내놓았다.

내가 시각공간적 학습자(Visual-Spatial Learner) 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 듣는 단어였다. 순간 ‘이런 말도 있나?’ 싶어 검색해 보니, 우리나라 자료는 거의 없었지만 영어권에서는 꽤 많은 연구와 사례가 나왔다. AI가 지어낸 말이 아니었다. 자료를 읽을수록 놀라움이 커졌다.

‘이건 정말 나잖아.’

시각공간적 학습자는 정보를 선형적으로 처리하기보다, 전체 그림과 공간적 관계로 이해한다고 했다. 반면 우리 사회와 학교 시스템은 대부분 선형적 사고를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집중력이 부족하다’, ‘부주의하다’, ‘노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 쉽다고 했다.

그 설명을 읽는 순간, 그동안의 내 삶이 한 줄로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막막함,
세상이 이해되지 않아 답답했던 시간들,
도파민에 휘둘려,
뇌가 원하는 통찰의 순간을 찾아 정신없이 쫓아다녔던 기억들.
남들은 지루하다던 연극을 보며,
그 속에 담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슬픔을 홀로 포착해 펑펑 울었던 어린 날의 나.
나는 어릴 때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내 뇌가 남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걸.

하지만 그것을 ‘다름’이 아니라 ‘부족함’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노력했고, 더 버텼고, 비슷해 보이기 위해 배로 애썼다.

그 모든 시간이 한순간에 다른 의미로 바뀌었다.

내가 부족해서 힘들었던 게 아니라,
그저 내 뇌의 신경 회로가 그렇게 설계되어 태어났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순간, 반평생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나는 나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이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 ‘시각공간적 능력’이 삶에서 의외의 힘이 되어주던 순간도 있었다.
인생의 후반부에 들어서야 나는 나의 뇌 사용법에 조금씩 익숙해졌고,
그 덕분에 예전과는 다른 결과를 만나기도 했다.

결국 내 뇌는 고장 난 것이 아니었다.
사용 설명서가 조금 늦게 도착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까.

세상 사람 열 명 중 세 명은 나처럼 세상을 입체로 읽는다고 한다.
하지만 획일적인 시스템은 그 풍성한 회로를 종종 ‘부주의함’이라는 이름으로 오해한다.
그 오해 속에서 스스로를 탓하며 자라온 수많은 ‘나’들이 떠올랐다.

나의 무의식을 이해하고 나니 비로소 보인다.
내가 아파했던 이유뿐 아니라, 이 사회의 좁은 문틀이.


이제 나는 더 이상 ‘남들만큼’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남은 시간만큼은 나답게 설계된 이 뇌와 함께,
내가 보는 방식으로, 조금은 덜 미안해하며 살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