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척하던 나에게 몸이 먼저 보낸 신호
요즘 다시 운동을 시작했더니 몸이 놀랐나 보다. 면역력이 떨어졌는지 입술에 물집이 불쑥 솟았다. 입술에 돋아난 물집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처음 대상포진 걸렸을 때 일이 갑자기 생각났다. 아직 결혼하기 전, 미국계 회사에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다.
당시 나는 미국 본사 출장을 앞두고 있었다. 출장 일정 중에는 내가 한 일을 본사 직원 앞에서 발표하는 임무도 있었다. 안 그래도 영어울렁증이 있는 나에게 미국사람들을 몇백 명 앉혀놓고 영어로 프레젠테이션 한다는 건 악몽 같은 일이었다. 게다가 출장 직전까지 마무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라 스트레스는 이미 한계치를 넘어서고 있었다.
문제는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시작됐다. 손목이 못 견디게 간지러워 살피니 벌레에 물린 듯 볼록하게 솟아 있었다. 엄청나게 간지러웠지만 참는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벌레가 문 것 말고도 걱정할 일이 산더미였다. 열 시간 넘는 비행시간 내내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호텔에 도착해 자고 일어나니 증상은 더 심해졌다. 벌레 물린 자국은 두 개로 늘어났고, 가려움은 통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호텔 응급키트에서 빌린 연고를 발라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다행히 하늘이 도왔는지 프레젠테이션은 무사히 끝났고,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제 남은 출장 일정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손목이 너무 아팠다.
본사 직원에게 부탁해서 회사에 비치된 약을 받아 발랐다. 그런데도 아무 차도가 없었다. 벌레 물린 부근 신경이 찌릿거리며 간지러워 다른 생각하기 힘들었다. 자고 일어나니 손목에 있던 물린 자국이 크게 부풀어 있었다. 물집처럼 말이다.
작은 수포들이 줄을 지어 팔 위쪽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찌릿한 통증은 이미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출장 일정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한국으로 바로 돌아갈 예정이었다면 조금 더 참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사 일정이 끝난 뒤, 같이 간 직원들과 여행을 가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시애틀에 있었는데 여직원 둘과 같이 보스턴과 뉴욕에서 휴가를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이런 상태로 보스턴으로 갈 순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회사에 있을 때는 통역해 줄 한국인들이 있었지만, 보스턴에서는 혹시 병원에 갈 일이 생기면 모든 걸 우리끼리 해결해야 했다.
같은 팀에 교포가 있어 그 친구에게 시애틀에 있는 응급실에 같이 가달라고 부탁했다. 그 친구가 통역을 해줘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았다. 응급실에서 의사는 손목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대상포진 같아 보인다고 했다. 다만 확실한 건 아니어서, 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놓였다. 아직은 아니어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피검사를 하고 약을 한 통 처방받았다. 병원에 머문 시간은 두 시간 남짓이었다.
다행히 그 약을 먹고 자고 일어나니 통증은 수그러들어, 무사히 보스턴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때는 매일 새롭고 신기한 경험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즐겁게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마음은 하루하루 살얼음을 걷는 것 같이 위태로웠다.
프레젠테이션에서 실수하면 어떡하지?
미국에서 운전하다 사고를 내면 어떡하지?
길을 잘못 들어 비행기를 놓치면 어떡하지?
생각해 보면 대상포진에 걸릴 수밖에 없는 상태였던 것 같다. 몸은 이미 한참 전에 신호를 보내고 있었는데, 나는 끝까지 모른 척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때 조금만 더 마음을 느긋하게 즐겼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난 아직도 미국의 의료체계를 이해하기 힘든 게, 응급실에서 진료를 다 마치고 돈을 지불하려고 하니 영수증을 우편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난 곧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더니, 거기로 보내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냥 가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명함을 주고 그냥 나왔다. 두 달 뒤, 한국으로 날아온 고지서에 적힌 금액은 무려 400만 원.
다행히 회사에서 들어줬던 여행자보험에서 비용을 내줬는데, 보험회사에 비용을 청구한 후 우편을 하나 더 받았다. 300만 원으로 비용을 할인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왜?라는 의문이 터져 나왔다. 보험사에서는 고지서 금액 그대로 400만 원을 내 통장으로 넣어줬는데, 정작 병원에는 300만 원만 내게 되었으니 뜻밖의 차액이 내 주머니에 남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이것도 끝은 아니었다. 얼마 후 병원에서 또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이번엔 의사들의 팁을 내라는 내용이었다. 교포 친구에게 물어보니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한다. "그거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도 돼."
입술 물집 덕분에 소환된 이 오래된 기억은, 오늘도 내게 속삭인다. 제발 몸이 보내는 신호를 모른 척하지 말라고.
가끔은 ‘팁 청구서’를 버리듯 마음의 짐도 툭 내려놓고 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