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니 고향이 되었다

선택하지 않았지만 도착한 곳

by dearMe

시골에 살고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느냐고 묻곤 한다. 하지만 사실 나는 시골에서의 삶을 미리 그려보거나 대단한 결심을 했던 사람이 아니다. 그저 부모님을 따라 이곳에 집을 짓게 되었을 뿐이다.


나는 딸 셋 중 가운데인데, 부모님은 늘 “너희 모두 결혼하면 우리는 시골 가서 살 거야”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언니와 동생은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했기에 부모님은 나도 곧 뒤를 따를 거라 생각하셨단다. 그때부터 부모님은 땅을 보러 다니셨지만, 나는 십 년이 지나도록 결혼할 생각 없이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그 바람에 공들여 골라둔 땅이 팔리고 놓치기를 몇 년간 반복해야 했다. 경기도 인근 전원주택 단지를 거의 다 돌아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뒤늦게 내가 결혼하게 되었고, 부모님은 오랫동안 미뤄왔던 집터를 마침내 구매하셨다. 십 년간 전원주택 단지를 샅샅이 돌아보셨지만, 단지 내 필지들은 너무 좁아 아버지가 꿈꾸던 넓은 정원을 만들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부모님은 단지가 아닌 널찍한 밭을 선택하셨다. 내가 일찍 결혼했더라면 아마 다른 지역의 평범한 주택단지에 살게 되었겠지만, 나의 늦은 결혼 덕분에 부모님은 십 년 동안 전국의 땅을 직접 보고 내린 결론을 실현할 수 있었다.


어느 주말, 온 식구가 모여 밥을 먹는데 아버지가 농담처럼 말씀하셨다. 생각보다 넓은 땅을 사게 되었으니 세 개로 나누어 나중에 자매끼리 나란히 집을 짓고 사이좋게 노후를 보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농담을 덥석 진담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있었다. 바로 내 남편이었다.


남편은 어릴 적 부모님이 시골에서 크게 양계장을 하셨는데,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에서 보낸 유년 시절을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남편은 곧바로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 왜 나이 들어서 시골에 삽니까? 시골은 기운 있고, 운전할 수 있을 때 살아야죠.”


부모님이 집을 지을 때 같이 내려가 살고 싶다는 선언이었다. 평생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나 역시 전원주택에 대한 막연한 로망이 있었기에, 땅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른 채 기꺼이 그러자고 답해버렸다.




그때는 아직 아이가 없었기에 시골에서 아이를 키우는 삶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그저 ‘자연 속에서 키우면 도시보다 좋지 않을까?’ 하고 순진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집터를 다지고 목조 골조가 올라갔다. 외벽이 생기고 집은 점점 형태를 갖춰갔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도시가스도, 상하수도도 없는 시골에 살고 있었다. 난방은 지열 보일러로 대신했고, 가스가 없으니 인덕션을 설치했다. 마당에는 우물도 팠다. 넓은 잔디 마당을 갖는 것이 소원이라 마당 가득 초록빛 잔디도 심었다.


집을 다 짓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는지 기다리던 아기도 생겼다. 진짜 문제는 임신과 함께 시작되었다. 늦은 나이에 귀하게 생긴 아이라 양가 부모님과 남편은 무조건 집에만 있으라고 했다. 가까운 슈퍼를 가려해도 차를 타야 했고, 친구를 만나려면 예전에 살던 동네까지 한 시간을 운전해야 했다. 아무리 그림 같은 집이라 해도 나가지 못하니 어느새 감옥처럼 느껴졌다. ‘가까운 곳에 말벗 한 명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생각을 했다. 퇴근하는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하루 한마디도 못 하는 날이 수두룩했다. 졸업 후 줄곧 직장 생활을 하며 사람들 속에 살아온 나에게 이런 적막은 생전 처음 겪는 것이었다. 아이를 낳은 뒤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말 못 하는 아기와 함께 종일 남편의 퇴근만을 기다려야 했다.




처음 2년은 시골살이에 적응하기도 전에 임신과 출산을 겪느라, 시골이 힘든 건지 육아가 힘든 건지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마당에 심어놓은 나무들이 자리를 잡고 과실을 맺기 시작할 즈음, 나 역시 이곳의 생활에 서서히 익숙해졌다. 여기서 태어난 아이는 이곳의 삶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기에 모든 것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신발을 신으라고 뒤쫓아가도 아이는 맨발로 잔디밭을 뛰어다녔고, 눈이 내리면 강아지처럼 눈밭을 뒹굴었다. 마당에는 초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과일이 풍성했다. 체리를 시작으로 블루베리, 딸기, 키위, 그리고 가을이면 사과가 주렁주렁 열렸다. 아이는 마당 나무에서 열매를 직접 따 먹으며 건강하게 자랐다. 아이에게 이곳은 ‘집 안에서 뛰지 말아야 할 이유’를 고민할 필요가 없는 자유로운 세상이었다.


봄이면 꽃들에 둘러싸여 살고, 여름이면 커다란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했다. 가을엔 바스락 거리는 낙엽을 구경하고, 겨울이면 마당에서 눈썰매를 타고 눈사람을 만들었다. 아이에게도 나처럼 동네 친구는 없었지만, 덕분에 우리 둘은 서로에게 세상 둘도 없는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이곳은 우리만의 온전한 공간이었고, 사계절이 분명한 작은 자연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시간이 흘러 자유롭게 자란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며 또래 친구들을 만났다. 사회성을 기르지 못했을까 걱정했던 것은 기우였다. 아이는 새로운 환경에 금세 적응했고, 나에게도 간절히 바라던 동네 사람들이 생겼다. 어느 날 빈손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들러도 흔쾌히 외상을 끊어주는 편의점이 생겼고, 우리 집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단골 미용실도 생겼다. 고민이 있을 때마다 달려가면 따뜻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카페 사장님도 계신다. 문득 생각한다. 과연 도시의 아파트에 살았더라도 이런 정겨운 이웃을 만날 수 있었을까.


코로나는 시골 삶의 풍요로움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주었다. 한 반에 열 명뿐인 시골 초등학교에서는 친구들의 얼굴을 매일 직접 마주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학교 텃밭에 물을 주고 수확을 하며 함께 자랐다. 날씨가 좋을 때면 뒷산으로 숲 체험을 다녔고, 운동장은 늘 아이들 발소리로 가득했다. 작은 학교를 찾아 일부러 이사 왔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내 아이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남편은 예전에 살던 농장 근처를 지나기만 해도 산 능선만 보고 고향 집 위치를 찾아내곤 한다. 언젠가 우리 아이도 어른이 되었을 때, 뒷산 능선만 보아도 이곳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유년 시절을 보낸 이 집을 따뜻한 고향으로 기억할 것이다. 이제 누군가 내게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내 이름으로 된 첫 집을 짓고 아이가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바로 이곳이 내 고향이라고 말한다.